마리아비틀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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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이사카 코타로는 내가 꽤나 신뢰하는 작가긴 하지만, 이 작품의 두툼한 분량 앞에선 조금은 두려운 심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도입부는 한눈에 이해관계를 파악하기 힘들어 몰입하기에 허들이 높았고 4개의 시선이 교차되는 전개 방식도 처음엔 복잡하고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사카 코타로가 천재란 건 잘 알지만 과연 650페이지가 넘는 분량 안에서, 여백 없이 빽빽하게 채워놓은 분량 동안 이야기를 치밀하고 지루하지 않게 전개시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심지어 작중 무대는 도쿄에서 모리오카까지 달리는 신칸센 안으로 한정되기까지 했다. 쓰는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읽는 사람에게도 이 작품의 설정은 확실히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사카 코타로가 설마 이 정도로 천재일 줄은 몰랐다. 이 작품과 같은 시리즈에 속하는 <악스>나 <그래스호퍼>를 비롯해 작가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나지 않나 싶었다. 뒤로 갈수록 촘촘해지고 기상천외하게 흘러가는 전개가 지루하지 않았는데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달리는 신칸센이 멈추지 않듯 나도 페이지를 넘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 작가가 캐릭터를 잘 만드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작품에선 유독 빛이 났는데, 독특하고 귀여운 코드네임을 가진 킬러들도 매력적이었지만 희대의 악역 '왕자'의 존재감이 단연 압권이었다. 이렇게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희망해본 악역은 처음인 것 같은데, 고백하자면 내가 이 작품에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바로 왕자의 최후에 있다.


 최근에 작가의 데뷔작을 읽고 보니 이사카 코타로가 악인을 그리는 것에 상당히 이골이 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흔히 유머러스한 작풍의 소유자라는 독자들의 인식이 무색하게 작가는 잔인무도한 캐릭터를 참 많이도 그렸는데 나는 그중에서 <오듀본의 기도>의 시로야마와 <사신의 7일>의 혼조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마리아비틀>의 왕자가 그 둘의 더 잔혹하고 재수없게 느껴졌다. 이 세 명 모두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아주 계획적으로 악행을 해나간다는 점이 닮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시로야마와 혼조는 아주 잔인하고 통쾌한 최후가 직접적으로 그려진 반면 왕자는 제3자가 '무척 잔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라고 암시하며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후를 반드시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왕자가 내면에서부터 몰락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던 만큼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후반부에서 왕자의 심리 묘사가 급속도로 적어진 점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이 어린 악마가 자신의 악마성과 천재성과 행운을 과신하다가 어떻게 절망에 빠지는지 꼭 보고 싶었는데, 왕자가 너무 교활한 인물이라 좀처럼 그럴 기미가 없어 보여 읽는 내내 애가 탔다. 겉보기엔 유복한 집안의 도련님 같은 이점을 살려 어른들을 물먹이고 상황을 자기 입맛대로 통제하는 왕자의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래서 후반부에 이 얄미운 새X가 완전히 의외의 인물에게 의외의 방식으로 한방 먹는 장면은 쾌감이 넘쳐났는데 당시에 왕자가 어떤 패배감을 느꼈을지 묘사가 충분하지 않은 감이 있는 게 지금도 불만이다.


 내가 허구의 인물에게 이렇게 적대감을 가졌다니, 지금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시나리오나 캐릭터 묘사가 수준급이었다는 반증일 테다. 얽히고설키는 흐름 속에서 자기 개성을 발산하는 캐릭터, 작품 내내 수다가 끊이질 않는 점이나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무수한 변수 등은 영락없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을 연상시켰다. 타란티노가 이 책을 침흘리면서 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사한 부분이 많았는데 악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비정한 전개, 악인의 최후가 특히 닮았다.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치자면 원작 없는 오리지널 각본만 고집하는 타란티노라지만 자신의 10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을 <마리아비틀>이 원작인 영화로 장식해도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지나친 욕심이려나?

 작가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작품에 여러 요소가 결합돼 한 권의 인문학 도서 못지않은 깊이를 담아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알코올 중독을 시작으로 르완다 학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꼬마 기관차 토마스, 제왕학,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까지 작가는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요소들은 인물들의 개성을 더해줌과 동시에 하나의 작품을 위해 이사카 코타로가 작가로서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줬다. 천재 작가지만 동시에 공부하고 노력하는 작가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자신의 천재성에 도취된 왕자와 상반된다는 점에서 더욱 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알 것도 같았다. 여담이지만 왕자처럼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인간처럼 자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역겨운 것이겠지.


 사람들의 무비판적인 모습에서 악이 태동하기 쉽다,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란 주제의식이 작가의 작품들에 크건 작건 녹아있는 것 같다. 그 어떤 작품보다 악에 대한 탐구가 압도적이었던 이번 작품은 치밀한 서사만큼이나 위의 주제의식 역시 돋보였다. 혹자는 너무 긴 분량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뻔하단 것을 문제삼던데,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라서 잠시 나는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생각해봤다. 단순히 취향을 저격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뛰어난 작품인 것인지 살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 모두가 입을 모으는 <골든 슬럼버>보다 더 재밌게 읽었지만 <마리아비틀>이 팬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많이 회자되지 않은 걸 보고 개인적인 취향이 적잖이 작용했는지 의심해봤다. 만약 이 작품을 이사카 코타로 월드에 입문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냐 묻는다면 분량 때문에라도 일단 다른 작품을 추천할 것 같다. 작가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특유의 스타일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과연 나처럼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싶던 것이다.


 내 결론은 이렇다. 다른 건 몰라도 <마리아비틀>은 객관적으로 이사카 코타로가 쓴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 그리고 오락성과 작품성을 균형 있게 잡으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독자마다 인상은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이보다 천재적인 작품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진지하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 된지 10년이 넘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압도적으로 추천해보고 싶었던 작품은 처음 읽어본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술 냄새뿐이라면 그나마 낫지. 인간으로서 역한 냄새를 풍기면 끝장이야. - 159p
 

기록이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상대를 속여서 기록을 깨뜨리게 만든 녀석이 입에 올릴 만한 말은 아니군. 그렇게까지 심금을 못 울리는 대사도 드물어. - 191p


세상에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어. 그러니까 '이것은 올바른 거다'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이 제일 센 거지. - 295p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거짓말만 흘려보낸다!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어쩌면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거짓말만 흘려보낸다!'는 정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바보일지 몰라. - 360p


죽음은 절망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종점은 아니다. - 458p


내면의 충실함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상상력이 단련되면 타인에게 공감하는 힘이 강해진다. 다시 말해 그만큼 나약해진다. - 526p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어른들이 품고 있는 꿈의 표현일 뿐이야. 꿈이라고, 꿈. 산타클로스가 있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지. - 532~533p


그래서 난 너무 이상해. 어째서 너희는 으레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느냐'는 질문만 던지는 걸까? 사실은 '왜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가', '왜 남의 집에서 멋대로 자면 안 되는가', '왜 학교에서 모닥불을 피우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들도 해야 하잖아. 왜 모욕을 주면 안 되나, 하는 질문도 있겠지. 살인보다 훨씬 더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칙들이 수없이 널려 있어. 그래서 난 늘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저 단순히 '사람을 죽인다'는 과격한 테마를 끄집어내서 어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려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부터 들지. - 5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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