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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7.5
내가 이 책을 군대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제법 인상 깊게 읽은 듯하다. 당시에 이용하던 수첩을 다시 펴보니 이 책에 9.5라는 점수를 매겼던데 지금으로선 그 숫자가 납득이 안 간다. 가볍게 읽기엔 나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주제의식이 뻔하고 스케일이나 가독성도 미묘하고 무엇보다 작중에서 청각장애인이나 그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방식도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듯한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데 그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에서 접하지 못했던 단순한 인물 묘사라 꽤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을 읽기 직전에 <나는 귀머거리다>를 읽어서 장애인에 대한 상투적인 묘사에 유독 반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웹툰을 접한 김에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읽고 싶어져서 이 책을 집어든 거라... 차마 작품을 접하는 순서를 탓할 순 없겠다.
연애소설이란 측면에서 보면 나름 괜찮은 작품이긴 했다. 청각장애인인 여자와 비장애인인 주인공이 필담을 통해 연애를 하는 장면 - 여담이지만 청각장애인은 연애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듯한데 바로 이런 독특한 방식의 연애 스타일이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은 연애 세포를 자극하고 주인공이 청각장애인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거나 주변 사람에게 선뜻 자기 여자친구의 장애를 밝히길 거리끼는 장면은 연애소설다운 방식으로 잘 풀어냈다.
중간중간 다큐멘터리 제작에 종사하는 주인공의 일 이야기는 흐름을 끊는 감은 있었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필요한 장면이긴 했다. 단, 주인공의 일 이야기가 가독성을 무지하게 갉아먹은 걸 보면 그렇게까지 분량을 잡아먹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분량 자체는 그리 길지 않을 텐데, 어쩌면 주인공의 연애사에 비한다면 낯선 나라의 테러 이야기 같은 건 기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고도의 연출이었던 건지 생각해봤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해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작가를 '멕이는' 고도의 돌려깎기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역자의 후기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자의 섬세하고 성실한 해석은 어휘 수준도 높고 유난을 떠는 구석도 없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다 읽은 직후에 역자나 평론가의 해석을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처럼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은 작품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역자의 해석엔 전부 동의하는 한편으로 이렇게도 평이한 작품에 이렇게나 훌륭한 후기를 쓸 수 있다니... 독자보다 원작자가 더 감사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너무 잔인한 평가이려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모든 작품이 다 마음에 들 순 없는 법이고 역자를 비롯해 다른 사람과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므로 역자의 해석에 공감이 가는 이상 여기서 작품에 대해 뭘 더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처음에 말했듯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건 내가 5년 전엔 이 소설에 9.5라는 점수를 매겼다는 것이다. 이게 단지 요번에 이 작품을 읽기 직전에 <나는 귀머거리다>를 읽은 탓이라고 여기기엔 차이가 너무 심하잖은가. 5년 사이에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인상이 급변하기가 쉽지 않은데... 얼떨떨하면서 어떤 의미에선 무섭기까지 했다.
p.s 원제인 '조용한 폭탄'을 '사랑을 말해줘'라고 바꾼 건 좋은 선택인 것 같다. 닭살 돋긴 해도 바뀐 제목이 핵심 주제를 더 잘 전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용한 폭탄'은 한 번에 와 닿지도 않거니와 어딘지 오글거리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직설적인 사람이 없으니까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은 거야. - 1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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