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듀본의 기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9.4







 이사카 코타로의 데뷔작은 작가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몽환적이고 심오하며 나쁘게 말하면 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은 여느 때처럼 센다이가 아닌 100년 넘게 외세와 단절된 가상의 섬 오기시마이고 말하는 허수아비가 등장하며 그 허수아비는 이방인 이토에게 '당신은 이 섬에 없는, 중요한 무언가를 가져올 사람'이라고 예언한다. 이윽고 범죄가 발생하고 머잖아 범인이 밝혀지는데 사건의 트릭이나 동기가 전형적인 추리소설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이 작품의 배경과 소재에 매료되지 않으면 '긴 분량에 걸쳐 고작 요런 이야기나 하려 했냐'고 누군가는 따지려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스케일은 미묘하지만 분위기가 중요한 작품이라 이사카 코타로의 팬을 제외한 독자한테 작품의 매력을 어필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두 번째 읽으니까 이 작품이 전보다 더 심오하게 느껴졌다. 데뷔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이 한 작품에 녹아든 내용이 방대해서 축약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크게는 편의점 강도 용의자인 이토가 경찰로부터 도망치다 오기시마에 오게 된 것, 그 이토가 그 섬에는 없는 중요한 무언가를 가져올 사람이란 예언이 나온 것, 사건이 벌어지고 그 범인의 동기나 사건이 벌어질 당위성이 도통 짐작도 안 간다는 것, 한편 섬의 바깥에선 이토의 동급생이자 절대악이라 할 수 있을 경찰 시로야마가 이토를 잡으려고 하는 것, 허수아비의 조언에 따라 끝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던 전 여자친구 시즈카에게 이토가 편지를 보내는 것 등으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겠다. 쑥쑥 넘어가는 가독성과 별개로 난해하기론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시키는데 데뷔작을 읽으니 이 작가가 왜 포스트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불렸는지 새삼 이해가 됐다.


 이후에 작가가 펼쳐보일 이사카 월드의 근간으로 삼을 만한 작품으로 팬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할 작품인데 특유의 유머 감각과 골때리는 캐릭터, 무시할 수 없는 정교한 퍼즐식 구성, 그리고 특유의 철학과 음악에 대한 예찬 등은 이사카 코타로가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될 정도로 데뷔작임에도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유일하게 튀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절대악 시로야마의 캐릭터성인데, 이후의 작품에도 잔인한 캐릭터나 상황이 많이 그려지지만 시로야마는 유독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개인적으로 사이코패스 캐릭터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돈데 비중은 적지만 등장할 때마다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라 그의 악행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특히 이만한 악인이 퇴장은 또 정말 어이없게 이뤄져서 정말이지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캐릭터다. 여담이지만 이 장면만 생각하면 난 꼭 쿠엔틴 타란티노가 생각난다.

 워낙에 얘깃거리가 많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두 캐릭터, 말하는 허수아비 유고와 무차별 심판자인 사쿠라에 대해서는 꼭 언급해야겠다. 일단 유고부터. 유고는 외세와 100년 넘게 단절된 오기시마에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캐릭터다. 허수아비지만 말을 하고 미래를 볼 줄 알지만 예언을 하진 않고 자신의 몸이 박힌 지면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지만 섬 바깥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모순된 존재가 바로 유고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섬 주민에게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지만 한편으로 그 어떤 사건이나 재앙도 미연에 방지하는 법이 없어 원한을 사고 있기도 하다. 이래저래 탄생의 배경이며 존재 이유를 상식적으론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인데 이 작품에선 마치 추리소설의 명탐정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최근 작품을 보면 이사카 코타로가 추리소설을 상정하고 쓴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데뷔작만 보면 영락없이 자기 스타일대로 추리소설 한 권을 쓴 느낌이 역력한 게 흥미로웠다. 단, 정통적인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먼데 굳이 분류하자면 메타 추리소설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이 작가가 은유한 추리소설의 철학적인 결함이나 명탐정의 역할에 대한 고뇌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고뇌에 필적할 정도이며 신선하기로는 작가의 여느 작품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의 메인 사건은 시시할지언정 사유나 주제의식은 탄탄하기 그지없었는데 혹자는 추리소설을 쓰려다 실패한 작품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5년 전에 처음 이 책을 읽은 내가 그때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작가의 고뇌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걸 보고 그렇게까지 매도하고 싶진 않았다. 반대로 이런 식으로 추리소설에 접근할 수 있구나 싶어 5년 전보다 더 신선하게 읽혔다. 아마 추리소설 독자라면 주제의식 면에선 높이 평가할 사람이 많으리라 본다.

 이번엔 사쿠라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시로야마와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캐릭터성을 가진 인물로 옛날에 읽은 어느 후기에서 누군가가 그 둘은 동전의 앙면과도 같다고 분석했던데 난 그 분석에 대해선 좀 아리송하다. 유명 영화의 악역으로 비유하자면 시로야마는 혼돈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이코패스라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닮았고 사쿠라는 복불복의 재난이라 평가받는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인만의 기준으로, 나름의 개똥 철학과 독선적인 행동력으로 섬의 시끄러운 인간을 총살시키는 사쿠라는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경찰도 인정해주는 공인된 심판자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공인된 심판자치고 자아도취하는 구석이 없다는 건데 그렇다고 이 인간에게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살인의 기준 자체가 터무니없는 데다가 그의 살인이 과연 정당한 심판이었는지 의심을 하는 섬 주민이 아무도 없어 이 정도면 무정부 사회와 뭐가 다른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데 작가는 이 의문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덧붙이지 않는다.


 섬에서 사쿠라의 존재가 용인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유고가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매커니즘보다 더 논란이 될 만한 지점일 것이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사쿠라를 통해 뭘 말하고 싶은지 지금도 헷갈리는데, 추측하자면 시로야마처럼 경찰을 가장한 절대악이 있듯 - 여기서 섬뜩한 건 시로야마는 자기 악행을 보다 교묘하고 성공적으로 달성해나가기 위해 경찰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가 정의의 심판이라 여기는 것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결함투성이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기 위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비판적인 복종에 대한 비판이 작가의 다른 작품, 특히 <마왕>에서 많이 다뤄진 걸 생각하면 그리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닌 듯하다. 외세와 단절돼 폐쇄성이 적잖은 오기시마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주 확신하긴 좀 그렇지만 페쇄성 짙은 사회일수록 무비판적인 복종은 쉽게 이뤄지는 법인데, 작가가 어디까지 의도했는지 몰라도 무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오기시마의 폐쇄성을 강조하고자 사쿠라란 캐릭터가 탄생하진 않았는지 감히 추측을 던져본다.

 저번에 읽었을 땐 시시한 작품이라 여겼는데 다시 읽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다시 읽으니까 작품의 내용이 더 심오하게 다가온 것도 놀라웠고 저번 포스팅과는 인상 깊은 구절이 다른 것도 신기하고 이번 포스팅이 훨씬 긴 것도 묘하게 보람이 느껴진다. 아마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어쩌면 두 번도 더 읽을지 모르겠는데 몇 년 뒤가 될지 몰라도 그때마다 인상이 다를 것 같아 미래의 그때가 사뭇 기대된다.




 p.s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408841419

 이건 5년 전 포스팅.

 

 

 

 

 

 

인상 깊은 구절

 

 

 

인생이란 건, 백화점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나 마찬가지다. 너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있어도 너의 위치는 어느 틈엔가 저 앞으로 나가 있지. 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흘러가는 거야. 도착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어. 제멋대로 그곳을 향해 간다 이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몰라. 자기가 있는 곳만큼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고들 생각해. - 53p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것, 이것은 인간만이 갖는 몹쓸 속성일지도 모른다. - 70p


생각해 봐, 그렇잖아. 저 다나카의 바람이 뭔지 알아? 만일 신이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쳐. 저 사람이 뭘 빌 것 같아? 난 알아. 저 다나카라는 남자는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걷게 해 주세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똑바로 걸어 보고 싶어요.'라고 할 거야, 틀림없어.

(중략) 그 기적이 나에겐 이미 이루어졌잖아. (중략) 나는 평범하게 걷고 있잖아. 저 남자가 신께 비는 소원이 나에게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그러니 나는 훨씬 낫다 이거지. 안 그래? - 115p


답장은 올까?

올 미래도, 오지 않을 미래도 있죠. 가능성은 양쪽 다 있단 말입니다. - 143p


이 명탐정이라는 인물은 뭘 위해 있는지 알아? 우리를 위해서야. 바로 이야기 밖에 있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시시해. - 159~160p


당신은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언지 아는가?

음악과의 교감? -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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