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2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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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다시 읽으면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다시 읽어도 인상이 거의 그대로인 작품도 있다. 비록 흔치 않지만 재밌게 읽었던 책이 10년 뒤에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을 텐데, <남쪽으로 튀어!>가 딱 그랬다. 지금 읽어도 역시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대학 강의 때 교수님이 이 작품을 두고 대중 소설치곤 괜찮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난 그 말에 썩 동의하지 못했다. 일단 그 교수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를 너무 잘 안 나머지 둘을 모르는 스타일이라 본인이 전공한 순수 문학만이 진리라고 여기셔서 대중 소설이라면 무조건 평가절하하고 보는 위인이다. 나는 <남쪽으로 튀어!>가 대중 소설'치곤'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장르를 초월하여 그냥 잘 쓴 작품이니까. 700쪽이 넘는 분량이 쉬지 않고 넘어가는 가독성, 만화처럼 선명한 캐릭터, 폭주하는 스토리와 그 속에 담긴 리얼리티와 사전 조사 등 소설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가 빼곡하고 수준 높게 구현됐다. 개중 가장 인상적인 요소로 단연 지로의 아버지인 이치로의 캐릭터성을 빼놓을 수 없겠는데, 내가 10년 전에 읽을 때와 지금 읽을 때 달리 느낀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치로에 대한 첫인상이다.


 이치로가 내 아버지라면 어떨까 하고 가정해보면 참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치로는 평범함과는 아예 담을 쌓은 인물인데 특히 첫 등장이 가관이었다. 연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국민이 되길 거부하겠다고 말하다니, 이보다 강렬한 등장은 없을 것이다. 옛 과격파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치로는 사고방식이 시위로 날뛰던 그 당시에 고대로 멈춰 있다. 한마디로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인물인데 어렸을 땐 이런 이치로가 그저 웃기기만 했다면 지금 읽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도 없구나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첫인상뿐이지 책을 완독하고 난 다음의 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치로가 민폐긴 해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나 그렇지 가정에선 가부장적이거나 폭군은 아니라서 - 초반엔 독재자가 아닌지 의심됐지만... - 점점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게 좋았다. 아들에게 꼭 자길 닮을 필요는 없다는 것. 이 말에서 이 책의 정체성이 자칫 시대에 뒤떨어진 공산주의 찬양이 아님을 제대로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정체성은 무리를 이루면 파벌도 만드는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안빈낙도가 어떤 형태인지 - 오히려 공산주의보단 무정부주의에 가까우려나. - 질문하는 것에 가깝다. 이치로가 지로에게 자길 닮을 필요는 없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정진하되 남을 속여먹진 말라는 말이 이치로의 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냈다고 본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주인공이 초등학생임에도 사상처럼 무겁고 위험할 수도 있는 소재가 하나도 불편하지 않게 다뤄졌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답게 주인공은 얘기가 어려워진다 싶으면 솔직하게 그런 얘긴 자기한테 해봤자 모른다고 독자들을 대변한다. 확실히 사상이 중요한 소재긴 하지만 그를 통한 계몽이 목표가 아닌 작품인 만큼 사상의 내용보단 사상을 갖고 행동하는 인물의 모습에 초점을 둔다. 덕분에 작품은 굉장히 유쾌하게 전개되는데 마냥 가벼운 것이 아닌 뼈가 있는 유쾌함이라 무게감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단순히 지금의 체제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삶이 아닌 패배할 것을 알고도 발버둥치는 삶에 호감이 느껴진다는 걸 작가가 제대로 어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은 사상을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는 걸 초등학생의 눈높이에서 오쿠다 히데오는 대단히 막힘없이 풀어낸 것,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10년이 지나서 읽어도 작가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엔 여전히 변함이 없었는데 다시 10년 뒤에도 이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최근에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작가를 디스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만큼 잘 만든 작품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만약 나온다면 독자 입장에서 너무 좋은 일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을 듯하다.



 p.s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둔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다. 김윤석이 이치로 역을 맡았는데 - 배역의 이름은 최해갑 - 배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선 아버지가 주인공으로서 극이 전개된다. 내 기억으론 그래서 영화가 소설의 매력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보는데 이 부분이 다시 봐도 인상이 그대로일지 궁금하다. 엄연히 아이의 성장담이었던 원작이 영화에선 어른의 기행으로 재해석된 감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아무래도 영화도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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