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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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강제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요즘엔 이렇게 책으로 타문화를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경험도 경험 나름인데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실로 귀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나한테 아주 생소한 이란의 근대사를 접할 수 있었는데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이 만화는 이란에 대해 무지한 유럽권 독자를 겨냥해 탄생됐다고 한다. 이 작품은 <쥐>, <팔레스타인>과 함께 3대 르포 만화로 칭해지는데 저자가 이 작품을 그릴 때 <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직 그 작품을 못 읽었는데 언젠가 한 번 읽어봐야겠다. 이런 걸 흔히 고구마 줄기 독서법이라고 하는데 이 책 덕에 <쥐>를 비롯한 좋은 책을 접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는 흔히 관심이 없는 문화권에 대해선 단편적인 정보만 갖고 획일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내가 이란에 가졌던 인상이 딱 그랬다. 한중일이 그렇게 다르듯 중동, 서남 아시아 국가들도 상당히 방대하고 다종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을 텐데 지금까지 그저 '이슬람 문화권'으로만 뭉뚱그려 인식하고 그 내밀한 면모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저자가 겨냥했던 유럽권 독자들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뉴스를 보면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인종 차별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 우리도 버젓이 무의식적으로 인종 차별을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차별하는 마음엔 국경이 없다.


 테헤란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주인공은 혼란스런 이란의 역사 속에서도 여차저차 성장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은 절대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기에 그녀의 미래는 결코 밝지만은 않다. 자기네 딸이 이래저래 퇴행적인 이란과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부모는 그녀를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갈 것을 권한다. 주인공이 이란에서의 유년기를 보내는 게 전반부의 내용이고 빈으로 유학을 간 4년 뒤에 이란으로 귀국했다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게 후반부의 내용이다. 전반부는 이란과 주인공네 가족에 대한 얘기가 중점적으로 다뤘고 후반부에선 외국에서 이란인으로서 살아가는 고충과 반대로 외국물 먹은 여성이 다시 이란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충을 다뤘다.

 이 작품의 장점은 일단 작가가 고향인 이란을 쉽고 깊이있게 묘사한 것이다. 외세에 시달리다 독재 정치에 신음했다가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역사가 제대로 꼬이는 이란의 상황과 그에 따른 주인공네 가족 주변의 환경을 그려내 자연스럽게 이란이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됐다. 생소한 나라였고 문화였지만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 '중동=이슬람'이 아니란 것만큼은 제대로 알았다. 주인공네 가족이 유복하고 화목하단 걸 감안하더라도 이란의 가정의 모습은 아시아나 서양의 문화권에 익숙한 내 눈에도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같구나 싶었다. 가족 사이는 끈끈하고 불의에 반감을 갖고 어떤 식으로든 피를 흘리며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모두 남일 같지 않았다.


 예전에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를 꼬집은 만화 <인티사르의 자동차>를 포스팅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한 명이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이슬람의 독한 규율이나 특정 성별에 편파적인 잣대에 대해 한 말이었는데 <페르세폴리스>는 여기서 '동의하지 않은 한 명'인 주인공이 이란에서도 외국에서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이란에선 교육 수준이 높아 보수적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대로 유럽에선 이란인이란 이유만으로 인종 차별을 당한다. 자국에 애정도 없고 비관적으로 바라봤던 주인공도 인종 차별에선 피가 솟을 수밖에 없다. 이란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란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치들이 멋대로 떠들어대기 때문에.

 작품은 주인공이 프랑스로 이민을 가면서 끝나는데 작가는 그 이후에도 녹록찮은 인종 차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맨탈이 강한 주인공은 그러한 차별을 의연히 넘겼겠지만 이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건 적잖이 짜증났을 터다. 그래서 이 만화를 그렸고 성과는 제법 거둔 듯하다. 유수의 만화상을 수상했고 작가가 제작과 감독으로 참여한 동명의 영화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에 질려 이란을 등진 작가의 작품이 이란을 드높인 셈이다. 이 작가가 아니었으면 이란에 대해 접하기가 쉽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부정할 수 없는 성과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명문은 이 작품에도 해당된다. 솔직히 말해 이 작품 덕에 이란에도 상류층이 있고 원래부터 이슬람교가 국교가 아니었으며 - 그 나라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게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가 형성된 것도 아니라는 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 그 전까진 국민들이 술도 마시고 해외 여행도 왕왕 다니는 등 우리와 하등 다를 것 없는 나라라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최근에 접한 소련 배경의 작품과 이 작품을 비교하면서 사회주의나 보수적인 종교나 하는 짓은 똑같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감시하고 유난을 떨고 생사람 잡고 정작 국민들은 코웃음 치고... 이 두 사회의 공통점을 통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세상은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일 뿐인 이 작품이 범세계적인 메시지로 감상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란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홀로 빈으로 유학온 것에 대해 스스로 해외에서 하릴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며 자괴감을 갖는다. 그런데 이게 주인공 기준에서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지, 아마 국적이 이란이 아니었다면 유학 생활 중에 방황은 좀 했을지언정 제법 건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 읽는 나는 씁씁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튼 주인공의 번민은 이란으로 돌아온 뒤에 다시 히잡을 써야하는 처지가 되면서 더 심화되는데 결국엔 특유의 맨탈과 가족들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우울함을 극복한다.


 한 사람의 근간엔 가족이나 국가 등 수많은 도움과 시련이 들어섰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렇게 자라난 한 사람이 나중에 세상이 끼치는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속된 말로 '내가 욕해도 남은 안 된다'는 심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이 좋든 나쁘든 이란과 세계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면 확실히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사사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읽기 전엔 어둡고 암울한 작품일 것만 같았는데, 흑백이긴 해도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가감 없이 뼈가 있는 내용을 그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기에 진입 장벽이 굉장히 낮은 편이라 금방 읽었다. 아무래도 자전적 이야기라 그리기에 애로사항이 많이 따랐을 텐데 - 약간의 과장이나 연출이 있었을지 모르겠다만. - 이 정도의 흡입력과 완성도를 갖췄다는 게 실로 경이로웠다. 동명의 영화와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하다. 부디 이 작품을 그린 재능이 이 작품으로 끝이 아니길 바란다.



 p.s 후반부에 주인공이 이란에서 다녔던 대학교에서 '진정한 종교인'이 등장하는데, 이런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박수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고, 주인공과 진정한 종교인이 있어야만 이란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란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곳이 다 마찬가지겠다.

살다보면 형편없는 인간을 많이 많나게 될 게다. 그들이 네게 상처를 주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렴. ‘내게 해코지하는 건 그들이 어리석어서‘라고.

그래야 그 못된 짓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단다. 세상에서 원한과 복수보다 나쁜 건 없거든... 늘 품위를 잃지 말고, 네 스스로에게 정직하도록 해라. - ‘지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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