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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8.8
추리소설의 외형적 화려함을 줄이고 온전히 추리하는 묘미에만 집중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 뭐가 됐든 범인은 마지막에 반드시 밝혀진다는 추리소설의 통념과 독자들의 불성실함까지 배신한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이번엔 반드시 범인을 맞히리라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고 하니 50:50의 확률이긴 하나 누굴 범인이라 지목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 용의자가 한 명이라 하더라도 결정적 증거가 없다면 범인이라 지목하기 힘들긴 매한가지일 터다. 오히려 용의자가 '두 명이나' 된다고 얘기해야 맞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 가가 형사에게 참으로 실험적이고 어려운 무대에 세우곤 한다. 가가는 이번 작품에선 등장하는 분량이 적지만 그 나름대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극을 이끄는 이즈미 야스마사가 도를 넘는 복수 행위를 단념하게 해야지, 또 그에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면서 어디까지나 조력자의 위치에 있어야지, 그러나 시리즈의 주인공으로서 너무 들러리여선 안 되는 등... 할 일은 많았지만 가가는 준수하게 모든 역할을 잘 수행한다. 분명 어느 뭐로 보나 주인공은 여동생을 잃고 복수를 다짐한 야스마사지만 가가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가의 등장이 사족일 수 있었으나 다 읽은 지금에 와서 보면 가가가 아니었다면 진행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새로운 형사를 등장시키면 아무래도 새로 소개하느라 전개가 번잡해질 테니까.
마지막 장으로 들어서기 전까지의 전개는 대체로 지지부진한 편이다. 두 용의자의 알리바이 공작은 눈길을 잡아끄는 면도 없고 내막도 그리 놀랍진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첨단 기술이 -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에서 - 잠깐 소개되지만 솔직히 뜬금없게 느껴졌다. 한 소설의 다양한 요소가 들어가는 건 눈여겨볼 만한 점이지만 이 작품에선 독자의 주의를 흐트러지게 만든 것 같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주의를 흐트러지게 만든다는 게 작가의 노림수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과했다고 생각된다. 소설의 본편은 사실상 마지막 장에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체 분량에서 보자면 너무 뒤쪽에 집중된 지라 상대적으로 전반부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밀도는 떨어질지언정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적잖게 포진됐으니 대놓고 지루했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초중반부가 좀 더 탄력적으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싶다.
반면 마지막 장에서의 수시로 번복되는 사건의 내막이나 유력 용의자가 바뀌는 양상은 흥미로운 걸 넘어 혼란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따라가기 버거워져 나도 모르게 추리에 손을 놓게 됐다. 그래서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알면서도 당황했다. 때문에 마지막 장만 다시 읽었다. 결국 '범인은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결론은 나왔다. 그런데 그마저도 정황에 따른 결론이라 석연찮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내 추리가 맞긴 한데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 범인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게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래, 너무 어려웠다. 내가 집중력이 약하단 걸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재밌었다. 정황에 따른 것이라도 어쨌든 사건을 해결하려고 머릴 굴린 건 퍽 유쾌한 경험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험은 성공적이다.
정말로 추리하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한 번 도전해봄직한 추리소설이다. 집중력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도전해보면 좋을 듯하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단어 하나도 허투루 읽지 않는다는 사람은 더더욱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 야스마사의 복수극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선 크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없다. 흔히 봐왔다고 할 만큼 평범한 이야기였으니까. 대신 작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에너지를 전부 추리 난이도를 올리는 것에 쏟은 모양이다. 그래서 소설로는 호불호가 좀 갈릴 것 같은데 이 생각엔 별로 자신이 없다. 아님 말고.
p.s 마지막 해설서가 생각보다 독특하고 재밌었는데, 해설서도 범인을 누구라고 정확히 밝히지 않아 좀 답답했지만 이것도 나름 읽는 재미를 첨가해 또 그것대로 나쁘진 않았다. 이 해설서가 처음 일본에서 출간됐을 땐 없었다는데 나중에 이렇게 해설서가 생길 정도면 이 작품이 일으킨 반향이 생각보다 컸던 듯하다. 출간된 직후에 '도대체 범인이 누구냐'고 출판사에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는 게 결코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