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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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상황의 심각함을 전달하는 방법엔 여러 종류가 있겠는데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겉으로 봤을 땐 따뜻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묘사하는 고차원의 방법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사린이 시가媤家에서 겪는 차별을 과장도 없이 효과적인 연출로 그려낸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방법을 다 활용했다. 소설로 치면 가독성과 문장력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작중에서 묘사된 시가의 모습은 현실적인 시각에서 봤을 땐 오히려 순화된 편이라는 건 뭇사람들이 동의할 듯하다. 어쨌든 사린과 구영은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일단 시부모들도 둘째 며느리 사린을 알게 모르게 차별할 뿐 본질적으로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일단 새겨봐야 할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식의 순화된 표현이 이 작품의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또 화목해보이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가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거기서 우리는 교묘하게 세습되는 차별과 불행이 정말 뿌리 깊게 박혀있단 걸 엿볼 수 있어 한숨이 다 나왔다.


 등장인물들 면면을 살펴봤더니 장단이 제각각인 게 가관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자기 아들을 감싸고,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도 회사 생활을 하지 않은 자신의 아내를 무시하고 결정적으로 가사事를 일로 취급하지 않아 작중 여자들을 비롯한 독자들의 속까지 박박 긁는다. 남편 구영은 차별 대우를 받는 아내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 본질적으로 공감하여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는 실수를 지속적으로 범한다. 사린은 기본적으로 똑부러지고 능력도 있으면서 '며느라기期' 때문에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마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 보는 입장에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이는 사린의 잘못이 아니다. 며느리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시댁과 처음으로 며느리가 된 여성들이 시댁한테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이용당하는 상황이 한스러울 뿐이지. 다시 말하지만 사린의 성격을 탓하면서 개인의 문제로 떠넘길 일이 아니란 것이다.

 이렇게 평범하고 일견 문제가 없어 보이는 집안에서도 사린은 속앓이를 하는데 그보다 더한 집은 어떻단 말인가. 만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린의 개인적인 이야길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면서 겪는 문제들이 상징하는 바가 워낙 커 독자들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와, 혹은 자신이 겪어야 힐 이야기와 무관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작중의 각 인물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실제 독자들이 실제 자기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텐데, 그게 생각만큼 잘 될지 모르겠다. 그냥 만화는 만화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서...


 처음엔 아기자기한 그림체 때문에 방심하면서 읽다가 뒤로 갈수록 이빨을 드러내는 통찰력 때문에 결말에 이르러선 마음이 뒤숭숭했다. 열린 결말이었는데 이 다음 장면이라고 사린과 구영 부부가 이혼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전개될 것 같진 않다. 슬하에 자식이 없긴 하지만 결혼이란 게 현실적으로 그렇게 쉽게 파탄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 - 구영의 동생 미영 부부는 또 몰라도... - 이다.

 시가에서 겪은 일들와 무관하게 어쨌든 그 둘이 일단은 사랑해서 결혼했고 무엇보다 사린도 구영을 사랑했기에 저도 모르게 며느라기의 함정에 걸려든 것을 보면 아직 이 둘의 관계는 개선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글쎄, 시부모들의 문제, 특히 시아버지의 문제가 고쳐지지 않은 이상 앞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일단 부부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그리고 무영이 잘못을 뉘우친 게 오래도록 이어진다면 부부의 관계만은 원만해질 여지가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내가 너무 낙관적이거나 이기적인 걸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영의 편을 들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말에서 사린도 이제 불합리한 상황에 거부할 용의를 밝혔으니 그녀의 결혼 생활이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변화하리라 기대할 만하다고 본다. 뭐가 됐든 사린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게 제일이다. 그러니 제발 그렇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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