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귀를 너에게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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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설마 <데프 보이스>의 후속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농인 사회를 제대로 그려낸 그 작품은 진지한 주제의식과 성찰, 그리고 농인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묘사가 돋보였는데 이렇게 후속작까지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내심 전편의 부제가 '법정의 수화 통역사'임에도 주인공이 법정에 서는 장면이 없었던 게 아쉬웠는데 작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건지 본작에선 바로 법정의 수화 통역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이 책은 전 경찰, 현 수화 통역사인 아라이 나오토가 농인 사회와 마주하며 겪는 에피소드를 모은 연작 소설집이다. 작가 자신도 <데프 보이스>의 후속작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러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이렇게 간신히 연작의 형식으로 뒷이야기를 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뭐가 됐든 정말로 반가운 후속작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나라에선 2년 만에 출간됐지만 일본에선 전편으로부터 무려 7년 만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후속작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기존의 주제의식이 더욱 심화됐다. 이 정도면 후속작이 또 나올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단 두 편으로 풀고 끝내기엔 이야기나 캐릭터들이 너무 아쉽다.



 '변호 측 증인'


 아라이가 법정의 수화 통역가로서 활약한 에피소드. 통역은 신성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라이가 좀 고지식한 감이 있지만 그만큼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다른 통역가의 귀감이 될 만하다. 특히 이번 에피소드에선 농인 사회 전반에 너무나 무지한 세상과 싸움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행보를 보인다. 무고하게 누명을 쓴 농인을 변호한 변호인 못지않게 아라이는 농인과 청인 양측이 납득할 수 있는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통역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저 놈(농인)이 그렇게 훌륭한 말을 했다고요? 당신이 지어낸 건 아니고? 믿기지가 않네. 순 벙어린 줄 알았는데.' 라고 냉대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분노했던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농인이 아닌 나도 뚜껑 열리는데 당사자는, 하물며 아라이는 오죽했겠는가.



 '바람의 기억'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라이는 통역가치고 사건에 꽤나 능동적으로 참여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선 아라이 스스로 '통역가 실격'이라 자책할 정도로 사건에 끼어든다. 자신들과 똑같은 농인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 범죄자들의 리더가 너무 골칫거리라는데 여느 통역가보다 괜찮은 수화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지목돼 아라이는 껄끄럽지만 리더인 신가이의 수화를 통역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실청한 중도실청자 신가이는 농인을 노리는 범죄 집단의 리더로서 '농인에게 세상의 무서움을 가르쳐줬기에' 오히려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고 적반하장식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실청된 자신과 다르게 수화를 구사하면서도 들을 줄도 아는 아라이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등 신가이는 자신을 다른 농인과 선을 그으면서도 청인이 되기를 갈망하고 질투하기도 하는 등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 언행을 보인다. 농인 부모의 들리는 자녀인 코다로 태어난 아라이는 그런 신가이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는데...


 신가이가 아라이를 질투하는 이유가 청인과 농인, 두 세계를 모두 발을 담그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 있다는 점에 눈길이 갔다. 청인만의 세계라면 몰라도 농인의 세계에도 발을 담그고 있단 것도 부럽다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우리 청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듯하다. 농인의 세계는 단지 들을 수 없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속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세계라고. 또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벗어나고 싶을 것이리라 지레짐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는 농인 입장에서 대단히 무례하고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다. 같은 농인을 등쳐먹은 신가이마저도 농인의 세계를 온전히 부정하지 못하듯 농인의 세계 역시 청인의 세계처럼 함부로 폄훼돼선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신가이가 뼛속까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는지 아라이의 참견에 의해 잘못을 뉘우치는 건 퍽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두 번째 에피소드가 제일 좋았다. 다양한 인격과 입장의 농인이 등장한 것도 흥미로웠고 아라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신가이의 모습이 한동안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의 귀를 너에게'


 작가가 직전 에피소드에서 통역가인 아라이가 너무 활동적이었던 게 내심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하고 자각이라도 했는지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그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단, 다소 지리멸렬하게 보이는 제목의 풀이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농인의 농聾이라는 한자에 그런 유래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농'이란 글자가 귀가 없이도 들을 수 있는 뿔이 있어 자연스럽게 귀가 떨어져 없어졌다는 얘기에서 비롯됐으리라고 몇 명이나 알고 있었을까. 단지 귀로 듣고 입으로 소리내 말하는 것이 곧 대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주변에서 농인을 보지 못하면 쉽게 떠올릴 만한 생각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제목에 담긴 의미는 제법 의미심장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도 의미심장한 나머지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번 에피소드는 아라이가 상대적으로 나설 자리가 적었던 것, 다뤄지는 사건의 윤곽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던 것, 수화 통역가로서 활약할 자리가 적었던 점들 때문에 가장 이질적이었다. 주요하게 다루는 소재도 농인이 아닌 함묵증에 걸린 아이였던 것도 이러한 이질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하지만 농인이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고 오해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로써 쉽게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는 함묵증을 앓고 있는 아이의 처지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고 이야기도 그를 적극 강조하고 있어 꽤나 통찰력이 돋보이는 세계관 확장이 아니었나 싶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씨앗을 뿌려둔 작중의 '정육학'의 개념, 국가가 '옳은 가정의 모습이란 자고로 이래야 한'고 주장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라 이래저래 곱씹을 만한 내용이 많았다. 추리소설치고 전개도 약간 심심하고 결말도 싱겁게 나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의 만듦새는 갖추고 있어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이제 바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 들릴 리가 없잖아. 바람은 이제 불지 않아. 만약에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네 안에서 들리는 소리야. 바람은 네 안에서 불고 있어. -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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