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쿠라 일기」전 모비딕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 3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8.7







 요번에 작가의 고향이자 책의 제목에도 명시된 고쿠라를 여행가게 돼 이 책도 읽게 됐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이자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등 현대 추리소설가들의 귀감이자 정신적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거장의 이력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추리소설가로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는 것. 책의 표제작인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데 원래 나오키상 후보작이던 걸 한 심사위원이 아쿠타가와상에 잘 맞는다고 생각해 낙선과 동시에 바로 그쪽 상의 후보에 올려 수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만큼 폐쇠적이진 않지만 일본 문단에서도 순수문학의 위상과 권위가 결코 낮지 않은 만큼 어떻게 추리소설이 최고의 순수문학상을 받았을까 싶어 늘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읽게 됐다.

 고쿠라에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까지 가니까 확실히 느낀 건데 이 작가를 단순히 추리소설가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건 좀 지양해야 할 일일 듯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기본적으로 사회나 인간의 어두운 측면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범죄가 등장하는 추리소설도 썼을 뿐이지, 단순히 추리소설 그 자체를 쓰는 작가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기념관에서의 전시 내용과 - 기념관의 내용은 추후 여행기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이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추리소설은 한 손에 꼽을 정도고 가장 궁금했던 표제작은 추리소설의 기법을 빌린 다른 형태의 소설이었다. 이 작가가 생전에 천 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한 걸 생각하면 의외로 알려진 것보다 집필한 추리소설의 수가 적을 수 있겠다고 생각됐다. 혹은 그런 특성 덕에 추리소설의 외연이 넓어진 것일 수도 있겠고.


 수록된 12편의 소설은 물론 저마다 양상이 다 다르지만 대체로 공통된 키워드를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초기작이라 이런 키워드들이 유독 두드러진 것 같다. 바로 '가난', '콤플렉스'가 그렇다. 특히 인텔리나 고학력을 향한 경멸과 그로 인한 자격지심, 피해망상 같은 게 인상적이었는데 화려하지 않고 어떤 독자의 말마따나 구수하기도 하지만 진솔하고 알기 쉬워 단편집임에도 금방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엔 몇 권으로 이뤄진 장편보다 여러 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이 완독하기까지 오래 걸리기도 하는데 이 책은 각 작품들의 공통된 키워드 덕분인지 맥락이 비슷해서 비교적 연속으로 읽기에 피로감이 적은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속된 말로 작가가 소설들을 '공장에서 돌린 듯' 쓴 건 아니라 3편씩 읽고 멈추고 다시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작가의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공장에서 돌렸다라는 말은 빈말로라도 나오지 않는다.

 원래 신문 기자를 꿈꿨던 만큼 이 작가는 취재가 천직인지 각 작품의 소재나 배경에 대한 설명의 깊이가 하나같이 감탄스러웠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가의 삶의 일부와 맞닿은 듯했는데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취재와 작가적 상상력과 해석을 매 소설 속에 녹여낸 건 소설가 지망생인 나를 상당히 자극시켰다. 이 정도로 공부해야 소설을 쓸 수 있는 건가... 하면서. 이러한 공부와 병행한 집필 활동은 평생 가난과 고졸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발로된 결과라 볼 수 있겠는데 이 정도면 콤플렉스를 무척 모범적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작가의 작품들 속 주인공에 비한다면 작가는 아주 건전하기 이를 데 없다.



 '아버지를 닮은 손가락'


 가난에 이골이 났을 작가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 사람이 가난하면 여유가 부족해지고 성격이 좁아진다는 전개를 자기 이야기를 하듯 세밀하게 묘파해냈다. 근데 사실, 가난이란 소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익히 다뤄진 소재라 더는 새로울 것도 없고 솔직히 말해 지긋지긋할 정돈데 마쓰모토 세이초가 쓰니까 무게가 확실히 달랐다. 작품의 시대며 배경이며 지금 내 처지와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심리가 낯설지 않았던 게 인상적이다.


 '어느 「고쿠라 일기」전'


 표제작. 주인공이 모리 오가이의 '고쿠라 일기'에 둘러싼 비밀을 추적하는 동기는 그리 와 닿지 않았지만 그 속엔 예술적인 숭고함이 깃들어 있어 확실히 아쿠타가와상에 어울리는 작품이지 않았나 싶다. 날 때부터 병을 안고 태어난 청년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홀어머니와 살아가는 정경이 상당히 짠했고 끝내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죽는 결말도 서글프기 짝이 없다. 삶 자체가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이라고 감히 말하긴 힘들지만 확실히 주인공 고사쿠의 삶은 그런 측면에서 꽤나 비범하게 다가왔다.


 '국화 베개'


 여성 하이쿠 문인인 주인공이 당대에 이름을 떨치고 그 이름이 어떤 식으로 지게 됐는지 살펴보는 전기 형식을 띈 소설. 앞서 수록된 두 작품과 비슷하지만 문단에서의 고립을 자청했다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던 게 달랐다. 이후 수록작에서도 이렇게 주인공이 어떻게 살다가 비극적으로 죽었다더라 라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보이지만 의외로 크게 비슷한 경우는 없는 건 또 신기하다.


 '빨간 제비'


 우리나라 사람으로선 그렇게 달갑지 않을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한국에서의 일본군의 이야기인데 의외로 읽다보면 그렇게 거북하진 않다. 작가가 딱히 한국 독자를 배려해서 그랬다기 보단 그냥 작품의 배경이 한국이고 주요 인물이 일본군일 뿐 역사나 정치와는 무관해서 그런 듯하다. 아무튼 위안부가 될 뻔했다는 낙인이 찍힌 여인들이 얼마나 기구해지고 전락해지는가 라는 주요 스토리 라인에 주목한다면 요즘에도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쳐도 그 사소한 낙인 하나가 - 특히 여성한테 찍히는 낙인이 그렇다. - 이렇게 뒤틀린 감정을 만든다는 건 참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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