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브라이언 리 오말리 지음 / 미메시스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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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난 이 작품을 사서 읽었다. 책의 가격이 25,000원인데 내가 아무리 만화를 좋아해도 저 가격을 처음 듣고 난색부터 표했음을 먼저 고백한다. 사실 나는 만화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으로 이뤄진 이상 어느 정도 분량이 갖춰진다면 소설보다 비싸야 한다는 지론을 늘 주변에 피력해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가격 운운하는 것이 좀 찔리지만 그래도 2만 원이 넘는 가격대는 아무래도 감상 자체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320페이지에 올 컬러, 게다가 하드커버라서 저 정도 가격이 책정된 거라 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역시 작품의 완성도다. 책의 디자인, 종이의 질, 출판사나 작가의 이름값이 대체로 책의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인 듯한데 그럼에도 결국 독자들이 최종적으로 만족도를 느끼는 부분은 당연히 책의 내용이다. 음악은 사실상 돈을 내지 않아도 유튜브에 검색하거나 아니면 길을 걷기만 해도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영화는 관람 시간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한 티켓값을 받는다는 것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이른바 가성비를 논할 때 책의 가격이란 것은 항상 소비자를 만족시키기에 불리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 이북이 아닌 이상 책은 책장 한쪽에 자리를 차지해 관리가 필요하고 특히 요새는 가격도 꽤 올라가 도무지 가벼운 기분으로 팍팍 사지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건 기본적인 얘기고, 독자 본인이 책에 노력과 시간, 심지어 기분에 따라 감상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나 만족도가 불확실한 게 책인데 가격대가 높을수록 한 사람의 독자로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과연 이 책이 종이의 질을 능가하는 만족도를 나에게 안겨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항상 하는 편은 결코 아닌데 가격이 가격인 터라 이번에 유독 이 점이 신경 쓰였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이 작품을 왜 사서 읽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처음 접하는 작가고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스콧 필그림' 시리즈에도 그닥 관심이 없었다. 작품에 대한 리뷰는 현저히 적어서 완성도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순전히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통한 첫인상만으로 이 책을 구입해서 읽기에 이르렀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이는 내 기준에선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과감한 도박인데 왜 이런 도박을 감행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고작 25,000원을 지불하는 게 무슨 도박일까 싶겠지만 난 보기보다 책 구입에 깐깐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선택이 아직도 불가사의하다.


 이런,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불가사의한 선택은 다행히 나에게 어떤 후회도 안겨주지 않았다. 살짝 위험한 생각일 수 있지만, 스케일이 작은 도박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작품의 그림체가 너무 좋았다. '모에' 요소를 남용하는 모든 일본의 만화가들이 속된 말로 머리 박고 반성해야 할 정도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체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서양의 그래픽 노블이라 명명되는 만화를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그림체는 그중 단연 으뜸인 걸 넘어서 어딘가 익숙하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작가가 한국계의 피가 섞인 캐나다 출생의 만화가란다. 하지만 그림체란 건 핏줄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데... 그냥 작가의 그림체과 원래 개성적이고 그 스스로가 연구를 많이 한 것이라 생각해야겠다.

 컬러풀한 그림체 덕에 가격에 대한 불안감은 일찌감치 사라진 대신 작품의 차분하면서 깊이가 있는 작품의 이야기에 서서히 빠져들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엄밀히 말하면 작품의 주요 소재인 평행 세계와 관련한 SF 설정들과 스토리 텔링은 그렇게 참신하지 않았다. 과거를 바꾸는 방식이나 방식의 기원에 대한 설정만 다를 뿐, 주인공 케이티가 겪는 온갖 일들과 감정 소모는 아주 새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아... 나올 게 나왔네', '예상대로군' 이라며 한숨이 나오진 않았다. 참신함은 늘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리라.


 케이티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몰입됐다. 제법 잘 나가는 셰프인 케이티는 본인 소유의 레스토랑 준비로 바쁜데 그 레스토랑의 부지나 내부 시공을 비롯해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자신만만했던 성격이 무색하게 케이티는 묘하게 신경질적이고 무기력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 남친의 등장과 그녀가 속한 레스토랑에서 가장 예쁜 직원인 헤이즐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화상을 입는 사건이 터지자 케이티는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 눈에 보이자 어떤 고민이나 의심도 없이 그 방법에 손을 댄다. 설마 진짜로 과거가 바뀔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저 바라기만 할 뿐이지.

 이후에 전개될 일들은 뻔하다. 점점 과거를 바꾸는 맛에 길들여진 케이티는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 가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 샌들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 <클릭>이 생각난다. 자신의 의식이 부재한 과거가 만든 낯선 현실이 아무리 이상적이라도 정이 갈 리 없다. 그런데 이상적이지도 않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과거를 바꾸는 대가가 이처럼 느닷없이 예측불허로 바뀌는 현실이라면 과거는 바꾸지 않고 그냥 현재에 만족하는 게 낫다. ...라는 교훈을 작품은 매력적이고 흡입력 있는 캐릭터와 이야기로 잘 이끌어내고 있다. 나도 그렇지만, 자기 인생을 돌아봄에 있어서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을까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꽤나 보편적으로 몰입 가능한 소재와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보편적인 이야기에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 즉 깊이다. 이야기의 깊이는 이 작품에서 그림체만큼이나 내세울 수 있는 요소다. 사소하지만 공감 가능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주인공 케이티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버거워 할 독자는 몇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케이티의 선택이나 그에 따른 후회 등도 마찬가지로 몰입하기 용이할 것이다.

 바뀐 현실로 인해 막장으로 치닫는 전개가 황당할 수 있고 결말이 맺어지는 방식이 뻔히 보이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하지만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원래 예상 외의 결말은 내기 쉬운 게 아니고 또 반전이 있는 결말이 무조건 좋은 결말이 아니기에 이 작품의 다소 뻔한 결말이 곧 작품의 단점이라고 봐야 할는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림체와 몰입도, 그리고 뻔한 소재나 결말애도 불구하고 몰입이 되는 스토리다. 그런 면에서 종이의 질이나 올 컬러 등의 이유로 높게 책정된 작품의 가격은 가성비의 논란을 무난히 비껴갔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이든 음식이든 뭐든 간에 2만 원을 넘게 지불하면 가성비를 느끼기 쉽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작품으로 기억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 특히 대표작인 '스콧 필그림' 시리즈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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