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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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작년에 노르웨이에 여행을 가고 나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전에 없이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처음 베르겐에 있는 KODE 미술관에 갈 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간다는, 순 계륵을 대하는 심정으로 미술관에 들어갔는데 그때 그 관람이 돌이켜 보면 여행 기간 동안 가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일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100년에서 300년 정도 되는 옛날 회화를 집중하며 볼 줄이야. 아까워서 몰입했다고 넘기기엔 꽤나 자연스럽게 몰입이 됐기에 혹시 북유럽 그림에 남다른 매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여행을 다녀오니 때마침 내 궁금증을 해결함에 있어 가장 필요한 책이 출간됐다. 감사하게도 내가 노르웨이의 미술관에서 접한 화가나 그림도 다루고 있었고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북유럽 화가들, 특히 덴마크 화가가 많아서 이래저래 유익했다. 단순히 그림 자체에 대한 감상이 전부가 아닌 북유럽의 사회상이나 시대상도 함께 들여다본 내용도 적잖아서 북유럽에 로망이 있거나 혹은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꽤 괜찮은 독서이자 경험이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에 대해 얘기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내가 크로그의 그림을 노르웨이에서 직관했을 땐 그냥 '그림이 참 사진 같다', '그림의 인물들의 눈빛이 살아있다'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읽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난 왜 이 저자처럼 그림을 진득하니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살짝 자괴감이 들게 됐다. 거의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간 미술관이다 보니 그림이나 화가에 대해 상세한 정보는 모를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생존을 위한 분투>


 난 이 그림 을 보면서 빵에 득달같이 손을 뻗는 앞줄의 아이들에게만 눈길이 갔지 뒷줄의 아이들이나 멀리서 뒷짐을 지고 있는 남자에 대해선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좀 거창하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포자기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뒷줄의 아이들과 멀리 있는 남자는 그런 아이들을 모른 척 지나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저자의 해석을 들으니 비로소 저 제목이 다르게 들렸다.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다 뒤늦게 미술의 길에 접어든 사람으로 때로는 기자로, 심지어 작가로도 활동했다는데 그림을 비롯한 생전의 여러 작품 활동의 특징이 소외된 자들에 작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일시가 어설프면 동정이나 연민, 끝에는 자기만족에 불과할 수 있지만 책에서 언급된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동일시는 그를 행하는 사람에게 정체성이 구축될 수도 있기에 그 위력이나 의의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위 그림의 전모를 살펴보면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깊게 다가왔다. 뒷줄 아이들의 체념과 멀리 있는 남자의 모른 척이 그야말로 사회 고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모른 척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지 않은가 하는 이 책의 해석이 과한 걸까? 다른 곳도 아니고 복지로 유명한 북유럽의 그림인 만큼 마냥 얼토당토않은 해석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노르웨이에서 왜 그토록 그림에 빠져들었는가. 이전까진 북유럽이니까 괜히 좋은 게 아닌 걸까 싶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 실마릴 짚어낼 수 있었다. 책에선 크로그말고도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고 얘기하는데 각각의 그림에서 풍겨지는 북유럽만의 감성과 특징을 잘 짚어내 하나같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미술관을 가기 위해, 좋아하는 화가의 무덤에도 가보고 싶어 여행을 떠난 작가인 만큼 지식은 자연스레 쌓였는지 나름 북유럽에 관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에게도 흥미롭게 들리는 얘기가 많았다. 가령 북유럽 그림들 속에서 유독 따뜻하고 당당하게 묘사되는 집안 살림이나 여성의 모습은 - 나체를 그린다 해도 그닥 선정적인 느낌이 없는 게 특징이다. - 오늘날에도 성평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로 북유럽다운 화풍이라는 것처럼 읽다보면 명쾌하게 다가오는 해석이 많았다.


 읽는 내내 어떤 그림도 작가의 생애는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나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북유럽을 들여다볼 수 있다니, 새삼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저자의 여행 방식이 무척 특이하고 탁월한 컨셉이구나 싶었다. 나도 읽었던 책의 실제 장소로 가는 성지 순례 비슷한 여행을 즐기긴 하지만 이 작가처럼 철저하게 돌아다녔는지 의문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북유럽이나 그림에 대해서만 배운 게 아니라 여행하는 자세나 열정에 대해서도 배운 것 같아 잠시 생각이 깊어졌다. 모든 지나간 여행은 다 아쉬운 법이지만... 더 공부하고, 더 몰입하면서 돌아다녔어야 했는데...... 언젠가 노르웨이를 비롯해 북유럽에 또 갈 것인데 그땐 이 작가만큼은 못하더라도 더 공부해서 더 알차게 돌아다녀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몰입할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에서 멈추려던 생각을 ‘그런데 무엇을 위한 몰입이지?‘라는 물음으로 바꾸게 한다. -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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