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 소실형 레드 문 클럽 Red Moon Club
가지오 신지 지음, 안소현 옮김 / 살림 / 201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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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군대에 있을 때 병사들 사이에서 선임이 후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벌이 뭐였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단연 '개통'을 먼저 댈 것이다. '개인정비 통제'의 줄임말인데 선임이 개통을 걸어버리면, 당사자는 개통이 풀릴 때까지 TV도 못 보고 책도 못 읽고 잠도 못 자고 전화도 하면 안 되고 사지방에도 못 가고 노래방도 못 가고 운동도 하면 안 되고 PX도 가면 안 되고... 한마디로 자유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여가 활동을 금지당하게 된다. 이 벌이 단순히 맞고 욕을 먹는 것보다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은 여가 활동이 가능한데 나 혼자만 그렇지 못한다는 고독과 답답함에 있다. 그야말로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당한다는 느낌에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할 정돈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도입함에 있어 아직 실험 단계에 있다는 '소실형'이란 형벌을 주인공이 받게 되면서 시작하는 작품이다. 배니싱 링을 목에 차면서 주인공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된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형벌이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도 걸 수 없고 일정한 거리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랬다간 배니싱 링이 목을 조여 몸을 가눌 수 없게 된다. 이는 존재를 증명하는 다른 활동, 글을 쓴다거나 영화를 보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돼 소실형을 받는 당사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실되는 것을 체감하고 만다.


 사실 이야기가 초반부를 넘어가자 약간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소실형이란 설정 자체는 신선하면서 딱히 구멍이랄 게 없어 기대가 되지만 설정의 특성상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 전개시키기 굉장히 까다롭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읽기 전에 들었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범죄를 저지르기 용이해지지 않는가 라는 의문은 배니싱 링의 자체적인 구속과 더불어 주인공처럼 비교적 온건한 성미의 범죄자만 처해지는 형벌인 것이란 단서가 있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전개가 따분하진 않을지 더더욱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마냥 관념적이지 않음에도 주인공의 처지가 처지인 만큼 이야기가 자꾸 안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듯이 전개돼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게 읽히지 않았다. 덕분에 소실형의 잔인한 면모가 부각된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설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았다. 솔직히 말해 중반부까진 익히 예상이 갔고 후반부의 전개는 극적이긴 했지만 무리수가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경험한 개통과 일맥상통하면서도 비교를 불허하는 소실형은 경험하는 이로 하여금 심각한 우울증을 초래할 것이 자명하단 점만으로도 일반적인 감옥살이와는 차원이 다르게 폭력적이다. 그래서 작중의 주인공인 가쓰노리가 아무리 실험이더라도 이 소실형에 처한다는 게 매우 잔인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하다 만 것 같아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또 가쓰노리가 죄를 범하는 계기에 대한 설명도 다소 뜬금없는 구석이 있는 등 주인공에게 불쌍함 이상의 입체적인 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아쉬웠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겐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큼 잔인한 벌은 없다는 작품의 메시지는 잘 와 닿았고 설정도 괜찮았지만 이야기와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못한 건 자꾸 걸린다. 주인공이 착하디 착한 나머지 소실형의 허점이나 존재 의의 같은 건 다뤄지지 않아서 작품이 분량에 비해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아까도 말했듯 익히 예상한 것을 넘어선 재미는 없어서 역시 소재가 독특할수록 써내려가기가 힘들다는 게 느낄 수 있었다. 쓰기에 따라선 한없이 철학적이고 진실할 수 있는 소재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 기대가 너무 컸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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