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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구제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평점 :
9.5
추리소설의 매력은 누가 뭐라 해도 반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추리소설이 늘 반전의 부담을 이겨내는 것은 아니다. 어쩔 때는 너무 뻔하고 어쩔 때는 너무 작위적이고 또 어쩔 때는 너무 예상 밖이라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럴 때 '반전은 중요하지만 반전을 위한 반전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작중의 여러 요소를 어떻게 조합시켜 연출하느냐가 반전의 깊이보다 관건일 수 있다.
이 작품은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유명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작품으로 <용의자 X~>와 똑같이 장편소설이다. 처음에 사건의 규모만 봤을 땐 단편일 것 같았는데 알리바이, 원거리 살인과 더불어 의외의 전개 - 삽질인 줄 알았지만 사건의 핵심이었더라는 식 - 가 기막힌 동기와 트릭하고 어우러진 등 꽤나 두툼하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용의자 X의 헌신> 바로 뒤에 나온 장편소설이라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게 불가피한 일이었고, 아쉽게도 전작보다 약간 임팩트가 약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자체적인 완성도가 뛰어나 작가의 작품 중 순위권에 올리기에 손색이 없지 않나 싶었다.
처음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이과생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가 십분 발현된 그야말로 'How done it?'의 모범 같은 작풍이 인상적이었는데 <용의자 X~> 이후로는 작풍에 변화가 가미됐다. 이러한 변화는 독특하면서도 아쉽기도 한데 물리학자가 논리를 적용시키기 까다로운 사람의 감정과 마주한다는 게 아이러니해서 재밌는 한편으로 시리즈 고유의 색깔이 옅어졌단 우려가 들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이를 의식했는지 작중에서 '허수해' 개념이나 공룡 화석에 대한 일화 등 개성적인 요소가 들어갔는데 생각만큼 잘 와 닿지 않았다. 특히 허수해 운운하는 건 겉멋 혹은 의미 부여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물리학자가 주인공인 시리즈의 개성은 후속작인 <한 여름의 방정식>에 가서야 되찾았던 것 같다. 그 작품을 읽으니까 명백히 비교되네. 지금 보니까 이 작품은 <용의자 X~>의 드라마와 시리즈의 과학적 색깔의 중간을 점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성녀의 구제>에서 트릭 못지않게 재밌었던 건 구사나기의 호감이란 변수였다. 아마 시리즈에서 구사나기가 가장 존재감이 있던 에피소드일 텐데 여담이지만 드라마처럼 가볍게 다뤄지지 않아서 좋았다. 드라마는 몇몇 캐릭터 변경에 의해 내용도 차이가 있었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이런 부분은 좀 아쉬웠다. 용의자를 향한 구사나기의 애정은 약간 케케묵은 감은 있어도 진실하고 또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도 하니 역시 원작에서의 묘사가 더 마음에 든다.
역자 후기에서 작품이 세 방향의 수사 방식이 다뤄져서 흥미롭단 말이 있었는데 나 역시 공감한다. 드라마와는 또 다른 소설만의 개성으로 감각 수사의 날카로움과 무모함을 보여준 우츠미, 다소 이성을 잃고 삽질을 하는 듯했으나 정석적인 수사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증명한 구사나기,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기발한 추리를 해낸 유가와. 이들로 대표되는 세 개의 요소가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범인의 동기가 비정상적이지만 공감도 가고 무엇보다 트릭으로써 대단히 잘 구체화된 것 같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목도 너무 훌륭하고. 늘 말하지만 제목 짓는 것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따라올 사람은 정말 많지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반전의 토대가 될 범인의 심리는 작중에서 그리 오랜 시간에 걸쳐 묘사되진 않지만, 트릭의 정체가 뜬금없지 않은 데에는 상술했던 구사나기의 호감이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 보답받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고 결국 제 손으로 자신의 감정을 좌절시켰으며 그를 위해 본인이 오랫동안 노력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요소가 범죄의 양상과 너무 닮아있어 안타깝고도 소름이 돋았다.
이성과 논리와 과학이 개입하기에 인간의 감정은 사회적 입장과 고집과 실수라는 변수가 있으므로 쉽지 않다. 이를 <성녀의 구제>는 '완전범죄는 힘들다'는 교훈을 내거는 추리소설의 통속적인 서사 안에서 잘 녹여냈는데 어떻게 보면 그렇기에 가장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