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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7일 ㅣ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9.3
스포일러 : 16% (마지막 문단)
전편을 읽은 지 좀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내용이 이어지지 않고 캐릭터와 설정만 겹치는 정도니 감상에 지장은 없었다. '사신 치바' 시리즈는 치바라는 사신의 시선으로 인간의 생과 사, 그리고 운명을 관찰하기에 읽는 입장에서도 열광스럽지 않고 초연하게 되지만 자꾸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희한한 작풍을 선보인다. 이런 작풍에서 언뜻 히어로 영화 <데드풀>이 떠올랐는데 사건의 주역이 어울리지 않게 시종 엉뚱함을 유지하거나 자신이 제3자임을 강조하려는 언동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데드풀은 주인공임에도 제4의 벽을 넘는 기행을 일삼는 게 웃겼던 것이고 치바는 엄연히 제3자이고 본인도 그걸 잘 아는데 자꾸 주인공네한테 얼쩡거리는 게 웃긴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사카 코타로의 장기들이 빠짐없이 녹아든 작품은 오랜만에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지루한 전개 빼고는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 많이 보여 읽으면서 점점 반가워졌던 작품이다. 암울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나사 빠진 행동을 보이고 농담이나 따먹는 인물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금 상황을 상기시키는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 - 작가의 데뷔작 <오듀본의 기도>에 나온 시로야마가 연상됐다. - 의 존재감, 지치지도 않고 집착하듯 강조되는 철학적인 주제의식과 명언... 뭐, 퍼즐식 구성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이사카 코타로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또 한 편 나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단, 책 뒷표지에 적힌 것처럼 <골든슬럼버>에 비할 만한 치밀한 플롯인지는 모르겠다. 나름 치밀했지만 지루함이 분명 있었기에. 치바가 작가가 만든 최강의 캐릭터란 것엔 이견이 없지만.
각종 창작물에 나온 사신 중 치바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라고 하면 만화 <데스노트>의 류크가 떠오르는데 다른 사신에 비해 인간사에 관심이 있고 일도 부지런히 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냉정해서 인간에게 깊이 공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무척 닮았다. 얼핏 애매모호해 보이는 이러한 존재감은 평소엔 유머러스하지만 중요한 순간엔 넘볼 수 없는 서늘함을 풍기는데 처음엔 이런 방관하는 태도가 뭐지 싶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진행이나 감동, 카타르시스를 묘사함에 있어서 대단히 뛰어난 설정이란 생각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알 듯하면서도 결국 예측을 벗어나는 언동은 사건을 필요 이상으로 꼬이게 하거나 아니면 허무하게 해결해버리는데 작중에서 치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해당 인간을 죽기 전 7일 동안 관찰하는 것뿐이기에 - 어차피 '가'로 보고해 해당 인간이 죽게 할 거지만 - 그가 범하는 돌발 행동이 등장인물이나 독자에게 그야말로 상당한 희로애락을 안겨준다.
치바가 담당하는 인간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결국 죽을 것이고 그 인간은 딸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라서 결말이 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결코 쉽게 결말에 이르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지루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는데,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파스칼의 <팡세>와 와타나베 가즈오의 말이 - 에도 시대의 산킨교대와;; - 많이 인용돼서 지겨웠지만 결국 그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궁금증과 두려움인 죽음과 그 이전의 삶에 대해 사유할 기회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데 작품에서 하도 많이 언급돼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독자는 물론이고 작가도 본인의 작품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규정하지만 본작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나누는 얘기들만 보면 여느 인문학 도서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인가, 죽은 그 이후가 무서운 것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무서운 것인가' 를 고민해보기도 좋았고 때론 '죽지 않아도 그 이상의 고통이 존재한다면 그건 무엇이고 그렇다면 죽음이 정말로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솔직히 보편적인 주제긴 했지만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게끔 최적의 상황과 설정이 마련됐기에 이 정도 수준까지 주제의식이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약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주인공을 괴롭힌 범인의 최후가 정말이지 죽음의 좋은 점을 역설한 나머지 -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은 덤이다. 아니, 끔찍한 건가? - 후회없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던 것과, 자식을 두고 먼저 영면에 든 주인공의 아버지가 놀이공원에서 유령의 집에 먼저 들어가는 것에 비유한 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발칙하고 유쾌한 시선은 작가의 개성과 직결돼서 작가의 다른 작품을 계속 찾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여름에 열렸던 작가 초청회가 기억나는데 그런 자리가 더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작품을 쓰는 작가와 그토록 짧게 대면한 게 정말 아쉽기 그지없다.
p.s 이 시리즈는 매번 원제와 출간 제목이 다르다. 이 작품도 원제가 <사신의 부력>인데 부력이란 단어의 뜻이 바로 와 닿지도 않거니와 눈에 띄지도 않아서 바꾼 게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7일'로 바꾼 건 좀 구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부력이 작품 이해에 있어 빠질 수 없는 단어라 제목에서 빼버린 건 역시 아쉽다.
가정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더 근원적인 후회, 즉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 105p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다는 핑계를 생각해내는 것과 목표를 변경하는 것이다. - 231p
살벌한 시대에 살벌한 걸 표현하는 건 재미도 없고 아무렇지 않아. 어차피 만들 거면 그 반대가 차라리 낫지.
(중략)
정말로 재능 있는 사람이 쓰면 걸작이 되죠. 하지만 대부분 흉내만 낸 것들이에요. 기왕 흉내를 낼 거면 검은 바탕에 검은색 말고 다른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낫죠. - 291~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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