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9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도 많은 책을 써서 간혹 이름으로 책을 팔아먹는 작가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나는 실망스럽기는 해도 중박은 치는 작품이들이 많기에 뭘 그렇게까지 평가절하를 하나 싶다가도 저서가 워낙 많고 또 개중엔 정말 대작도 많아서 그런 작품으로 작가를 먼저 접한 독자들은 그렇지 않은 작품에 배신감을 느껴 혹평을 내리는 게 아닐까 하며 내심 공감이 간다. 방금 말했듯 히가시노 게이고란 작가는 놀랍게도 대작도 적잖이 써냈는데 그중에서 이 작품 <악의>는 아마 거의 모든 팬들이 최고작으로 꼽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리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명성은 그냥 두고 넘길 수 없다.
내가 책을 다시 읽을 때면 최소 5년 정도 지나고 다시 펼쳐든 경우가 많다. 그 정도면 어렴풋한 스토리 라인만 기억나고 디테일은 대부분 잊혀져있기 마련인데 <악의>는 그렇지 않았다. 내용, 전개, 그리고 반전이 강렬하기 짝이 없어서 놀라울 정도로 선명히 기억났다. 오죽하면 두 번 읽을 필요를 못 느낄 정도였는데...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사실 추리소설은 반전에 죽고 살기에 두 번 읽을 필요까진 없는 장르라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정말 잘 쓴 추리소설의 경우엔 설령 모든 전개가 기억나도 복선의 교묘함과 연출만으로도 몇 번이고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게다가 나 같은 경우엔 추리소설의 작법에 따라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기에 더더욱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 수 없었다.
상술했지만 너무 강렬한 작품인 나머지 처음 읽을 때에 비한다면 그렇게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읽진 못했다. 강렬한 반전이 이렇게 독이 되는 구나 싶다가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어내려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읽을 때 눈여겨보지 않은 장점과 옥의 티가 이번엔 보였다. 난 이 두 가지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눈여겨보지 않은 장점과 옥의 티는 이 작품의 3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나오는 것들이다. 눈여겨보지 않은 장점이란 범인의 진정한 동기를 설명함에 있어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의 진술로 짐작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이는 작가의 대표작 <백야행>에서 적극 활용된 기술인데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여백을 둠으로써 독자가 그 사이를 상상으로 채워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저절로 추리와 놀라움이 동반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세련되고 합리적인 서술 방식이라 생각하는데, 일단 가독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필요하고 절묘한 정보를 써내려간 동시에 자질구레한 감정의 편린을 독자의 상상의 재미로 남겨둔 점에서 그토록 감탄했던 것 같다.
반면 옥의 티는 범인이 살인을 결심한 계기였다. 주의할 것은 동기와 계기가 살짝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난 이 부분만은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는데 딱히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사족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이 계기의 내용과 밝혀가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하고 오싹했지만 이 때문에 가장 중요한 동기의 단순해서 오싹한 점이 약간 묻힌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의 <붉은 손가락>도 추리소설적 반전이란 틀을 우선하느라 괜히 한 번 더 꼬아서 아쉬웠었는데 <악의>도 비슷한 부분에서 놀라움이 감소돼 그 점이 좀 아쉬웠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도 나왔다는데 우리가 아는 아베 히로시 주연의 '신참자' 시리즈의 작품이 아닌 2000년대 초반에 제작된 스페셜 드라마라고 한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이 다시금 아베 히로시의 연기로 리메이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 <기도의 막이 내릴 때>가 시리즈의 최종화라고 하니 <악의>의 드라마화는 못 볼 듯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게 드라마 시리즈한테나 시리즈의 팬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드라마는 가족애를 기본으로 한 감동 코드로 흥행했기에 그와 결이 다른 <악의>는 자칫 시리즈의 분위기를 흐리게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원작 특유의 서술 방식 또한 한 사람의 팬으로서 영상화가 잘 될 것인지 확신이 안 서기에 이래저래 냉정하지만 납득은 가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가 형사' 시리즈의 알짜배기 작품을 두 번씩 읽었다. 이제 드라마랑 그 외의 다른 시리즈 작품도 보면서 최신작을 기다려야겠다. 정말 올 해 출간되긴 하는지...
p.s 따로 인상 깊은 구절로 적은 '남을 비난하는 인간'이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최근 학교에서 합평 시간에 사람들을 너무 심하게 비판했는데 행여 도를 넘지 않았는지 괜히 불안해 잠이 잘 안 온다. 앞으로 잘 해야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건 착각 위에 성립되는 거야. 교사는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학생은 뭔가를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지. 그리고 중요한 건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행복하다는 거야. - 83p
적극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인간이란 주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을 통해 희열을 얻으려는 인종이고, 어디 그럴 만한 기회가 없는지, 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는 누가 됐건 상관없는 것이다. - 25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