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9.7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와 마주했는데 그 결과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알게 될 때 선뜻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 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나. 비극을 야기한 행동이 사소하고 생각 없는 것일수록 우린 오히려 더 당당할 수 있다. 일단 법적으로 죄를 묻기도 어렵고 나 혼자만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그 정도 사소한 잘못은 저지르곤 하니까. 그래서 나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점차 스스로한테 설득당하기에 이른다. 난 정말 잘못이 없었잖아?

 누쿠이 도쿠로의 <난반사>는 사소한 악행이 불러온 상상을 초월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가로수가 쓰러져 아이가 머릴 다치고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는 서두에서 이 사건은 살인이고 범인은 세상 사람 모두라고 한다. 엄청 거창한 서두인데 간단히 말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작품으로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하긴 할 테지만 더 깊게 생각하진 않거나 혹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지점을 파헤친다.


 허영심을 위해 환경 보호를 자처한 주부, 야간에 상습적으로 진료를 받는 병약한 학생, 허리가 아파서 개똥을 방치하는 남자, 불편하고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의사와 공무원, 운전에 적잖은 공포를 갖고 있는 여자 등 작품에선 실로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이 일상 속에서 각자만의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지키지 않은 사회 규범들이 어느 날 한꺼번에 어겨져서 터진 비극까지가 마이너스 부분, 그 이후 아이의 아버지가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관계자를 찾아다니는 게 플러스 부분의 내용이다.

 처음에 비극을 예고하고 -44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숫자가 0에 가까워질수록 불길함이 짙어진다. 캐릭터간 행동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추측하느라, 그리고 읽는 동안 은근히 고갤 끄덕이게 되는 이들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비난받을지 내가 다 걱정이 돼서. 아니나 다를까,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암을 유발하는 전개와 리액션이 나오는데... 전부터 느꼈지만 이 작가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들어서 몰입시키는 재주가 상당하다. 어쩌면 사회파 추리소설의 미덕인 문제 제기에 그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직 반려견이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긴데, 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똥을 치우지 않곤 했다. 비닐을 깜빡하고 안 갖고 나오면 그 똥을 나뭇잎으로 싸 수풀에 던졌다. 당시엔 나무의 거름으로 좋지 않겠느냐고 합리화하며 자릴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민폐를 끼친 셈이다. 그런 나의 행동을 보고 가끔 따끔하게 지적하는 동네 이웃이 몇 명 있었는데 그땐 뒤에서 엄청 욕을 해댔다. '다 나무들 좋아라고 하는 건데' 라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나도 결국 이 작품 속 인물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귀찮아서 저지른 매너 없는 행동이 다행히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을 뿐 - 혹은 터졌는데 내가 모르는 것뿐일 수도... -  합리화를 해대느라 잘못이 잘못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몇몇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 그런 것처럼 이 작품도 일반적인 추리소설과 결이 다른, 어떻게 보면 혁신적이고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의 탈을 쓴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었다. 내용 전개가 불길한 한편으로 충분히 다음 내용이 짐작되고 살해당한 아이의 아버지 가야마가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너무나 사소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한테마저 책임을 묻는 전개가 다소 불편한 전개라서 전체적으로 읽기에 껄끄럽고 고통스러웠다. 작가도 그를 느꼈는지 에필로그로나마 가야마 부부를 위로하는데 사족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책 중 가장 잔혹했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는 마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읽기 불쾌하지만 가독성은 상당했다. 위에 개똥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일부 나랑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인물이 등장해서 정말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그만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범죄라고 의식하지 않는 미묘한 악행을 그렸는데 그 악행을 이끌어내는 심리의 묘사가 워낙 출중해서 이 부분만으로도 상당히 재밌었다.

 작품의 주제도 너무 좋았다. 아이의 죽음에 연관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그들 일상에 저마다의 상당한 균열이 생긴 점을 주목하면 - 물론 가야마는 알 수 없지만 - 우리들 일상의 죄가 법적인 책임만 물을 수 없는 것이지 도덕적 책임 아래에선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린 법 아래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도덕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므로 절로 경각심이 불러일으켜졌다. 등장인물 중 어느 한 명한테라도 공감한 독자일수록 경각심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행동이 결코 바라지 않을 비극으로 돌아올 것이란 상상을 한 번이라도 한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말이다.

난 세상 사람들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비판 메일의 내용처럼 가야마가 규탄한 ‘사소한 이기주의‘는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가 우연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연결되었기에 특별하게 보일 뿐, 몇백만 몇천만 사람들은 날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것을 가리켜 ‘죄악‘이라 규탄한 가야마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인지도 몰랐다. 넌 뭐가 그리 잘났어, 하는 반발심이 비판 메일의 등 뒤에 비치는 것 같았다.

(중략)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주장만 하면 어느 시점에 파탄이 난다는 것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러 상상력을 죽이고서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것인가. 손안에 있는 코딱지만한 권리가 그토록 사랑스럽단 말인가. - 45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