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현대음악이란 말을 만들고 싶다. 돌발하는 새울음의 묘사에 최적화된 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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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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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이자, 본서 독후에 확인용으로 읽기 적합. 잘 정리된 글이지만, 이 개념들이 정말로 이렇게 단순하리라 생각하면 오산. 인용시 본서 확인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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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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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낯선 것은 만드는 것이다.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다. 조이스가 우리에게 제시했던 낯설기 짝이 없었던 글들이 바로 그가 만들어냈던 것들이라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가 낯섦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노정을 그리고 있다. 흔히들 놓치게 되는 이 소설의 표사(表辭)에서 부터도 조이스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조이스는 신과 같은 예술가의 변신 후일담을 소개하려는 듯이, 제우스의 변신 신화에서 따온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미지의 기술에 마음을 쓰고자 한다.” ‘미지의 기술로 채워진 낯선 한 작품, 그리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낯선 한 명의 존재자는 어떻게 탄생되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나오는 1장의 문두부터, 디덜러스가 해방되고자 했던, 그러나 디덜러스의 몸과 같이 디덜러스를 끝내 묶고 있었던 한 무의식이 탄생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디덜러스 조차도 어렴풋하게만 기억하는 요람기의 이 서사는 그에 적합하게 단순한 어휘들, 의성어들, 단순한 노래들, 유아기 언어들(그 파얀 잔니꼬 피고)로 쓰여 있다. 이런 문체론적 실험들은 후에 조이스의 특기로 우리가 알아보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세 장도 안 되는 분량으로 짧게 쓰여 있는데, 소설에서 예민한 독자를 기다리면서 내내 변주되는 주요 주제들이 결집해 있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나는 몇몇 장면에서만 그 변주를 확인할 것인데, 사실 더 많다.

 

우선 이 소설은 서두는 이렇다.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 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겅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턱쿠 아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 암소의 이미지도 반복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예술가로서 디덜러스의 삶에 불을 댕긴 여러 사람들이, 모두 여자라는 것이 우선 그러하다. 디덜러스의 첫 벗째 타락이라 할, 화류계 여성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는 미궁처럼 널려 있는 좁고 더러운 거리로 헤매며 들어갔다.”(156) 

알다시피 미궁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 소를 만나러 들어갔던 미로이다. 그리고 디덜러스가 예술가로서의 자기 삶을 확신하게 되는 그 유명한 해변에서의 에피파니 장면에서 그의 친구들이 불러대는 디덜러스의 별명도 부스 스테파노포로스”(259)희생을 위해 화환을 쓴 황소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화환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호명은 자기 안의 암소를 불러내리라는 징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디덜러스가 모성에 대한 애착을 상징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디덜러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만큼이나 벗어나야할 대상으로 묘사된다.

 

찰스 아저씨와 단티가 손뼉을 쳤다.”라는 문장이 있다. 찰스와 단티는 소설에서 잠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찰스는 디덜러스에게, 아일랜드 민족에 대한 투사적인 애정 의식을 심어준 사람이고, 안티는 아줌마라는 뜻인데, 안티의 아이들 식 발음인 단티는 디덜러스에게 반대로 아일랜드에 대한 도피의식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손뼉소리가 디덜러스에게 각인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애정의식과 도피의식의 결합은 조이스에게 아일랜드에 대한 애증어린 비판으로서 현현된다. 이러한 양가적인 비판 의식은 이 소설에서는 당연하고,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의 마비의식을 묘사하고자 하였다는 더블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의 조이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난다.

이 이중성은 다음 문장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단티의 옷장 속에는 솔이 두 개 있었는데, 밤색 벨벳으로 등을 싼 솔은 마이클 대비트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녹색 벨벳으로 등을 싼 솔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파넬과 대비트는 처음에는 절친한 정치적 동지였다가 후에 대립하게 된 아일랜드 주요 정치인이다. 

잠시, 이 시점에서 이 소설 어느 곳이든 아일랜드 현실이 배면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려, 아일랜드의 정치사를 잠시 들여다보자면, 정치가이기보다는 사회운동가였던 대비트는 헨리 조지에 감동받아 지금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지세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 부터 파넬은 대비트와 대립하게 된다.  대비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대지세 부과를 핵심으로하는 조지주의라고도 불리는 조세이념의 창안자 조지 헨리를 실제로 만나서는 "진보와 빈곤"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현실에서의 실천의지까지 밝히자, 조지 헨리가 "아일랜드의 토지문제"라는 "진보와 빈곤"의 편저작이라고 할만한 책 발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이 책 발행 계기로 아일랜드는 대지세 논쟁에 휩싸이게 되는데, 여기에 파넬이 반대 입장에 선 것이다. 정치의 혁신과 안정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읽을 수 있는 일화이다. 여기서 하지 않겠지만, 디덜러스, 즉 조이스의 현실인식이 누구에 더 가까웠는지를 중심으로도 이 소설은 해석 가능하다.

 

 

다음. 잠자리는 오줌을 싸면 처음에는 따뜻하지만 이내 싸늘해진다.” 요람기 디덜러스가 오줌을 싼 것이다. 1 장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감각은 이에 맞춰서 촉각이 된다. 그렇다고 강박적으로 촉각만이 묘사된 것은 아니고, 다른 장보다 주요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덜러스가 성장해가면서 부각되는 감각들은 촉각에서, 후각으로(2장 첫 문장, “찰스 아저씨가 검은색 노끈처럼 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조카는 아저씨에게 정원 끝에 있는 작은 별채에서 아침 담배를 피우도록 권했다” 95), 그리고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청각으로 변한다.(3장은 아예 주교의 설교로 가득차 있으므로 청각이 중시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때 어머니는 그에게 금지에 대한 강고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 스티븐은 잘못을 빌 거에요.”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냉정한 단티가 말한다. “, 만약에 빌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눈알을 빼버릴걸그렇다 디덜러스에게 금지를 설정하여서, 욕망의 기반을 제시했던 독수리들의 세계는 학생 스티브에게 가장 달콤한 세계였던 동시에, 예술가 디덜러스에게 가장 잔인한 세계였다. 그러나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디덜러스는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이 성공적인 실패의 일화를 간단히 말해보자면, 디덜러스는 자전거 탄 문법1반 학생과 부딪쳐서 안경이 깨졌는데, 그것 때문에 수업을 받지 못하자, 선생인 신부에게 처벌받게 된다. 안경이 깨진 것, 그것도 문법이라는 규제의 표상과 맞부딪쳐서 파괴된 것은, 디덜러스의 세계가 상투적인 문장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리라는 한 징조이다. 그러나 이 징조는 아직 씨앗이다. 결국 그는 부당함을 호소하러 층계참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거기서 교장인 콘미 신부에게 그는 성공적으로 청원한다. ‘독수리의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디덜러스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무의식을 극복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굳이 이 앞부분에만은 자세한 해석을 삼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존재자가 낯선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자기 무의식까지 깊숙이 침투해있던 친연적인 혈연의 세계와 협소한 국가의 세계와 종교적인 금지의 세계를 벗어나야했다.

 

이는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결말 부분의 이 문장으로 압축된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379)

 

이것은 예술가만의 선언은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단지 한 욕망에 지쳐서 새로운 욕망을 갈구하는 식의 삶에 빠져있지 않으려면, 현재의 제 삶을 과감히 소진시켜야 한다. 누구도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디덜러스는 만드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이 거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와 동생들의 삶을 버리고, 거의 방랑에 가까운 유학의 길을 택한다. 혈연의 세계가 부가하는 책임에 그는 일단 침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안에 그는 가족을 책임지는 충실한 고위급신부가 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언제나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인류에게 던지는 희생을 위해 화환을 쓴 황소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국가를 떠난다. 일제시기 지식인이 낯섦을 만드는 자로 거듭나려, 조국을 떠나서, 직접적인 민족운동과는 소원히 지내면서 예술적 수양만을 해나갔다고 생각해보라. 거기다 민족주의에 대한 조이스의 냉소적인 시선과 유사한 시각을 드러내는 작가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떠올려보자. 결코 좋은 이야기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이스는 예술을 선택했고, 국가를 떠났다. 그는 예술의 영역 안에 유배(流配) 당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고, 유배는 어디까지나 형벌이다.

물론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들이 있다. 조이스는 민족주의를 비난했을 뿐이지, 민족을 매도하지는 않는다.  매사를 조롱하는 조이스이지만, 불우한 아일랜드인에 대한 묘사에서만은 작가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만큼 연민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부끄럽게하는 어떤 작가와는 다르다.

 

또 디덜러스가 벗어나야 했던 교회의 세계는 단지 한 종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교회는 우리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체계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라면 이것은 자본주의이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청교도만 아니더라도,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윤리는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 어쨌든 우리가 우리 체계에 가지는 열정은 디덜러스가 교회의 강건함에 한 때 탐닉하여서 그것을 익히고 헌신하려고까지 하였던 그것보다 덜하지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에 때로는 생계를 의탁하고, 그 편리를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디덜러스와 다른 점은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조이스의 삶을 보건대, 조이스는 디덜러스와 더불어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도 머니머니 해도 우리를 가장 망설이게 하는 것은 디덜러스의 절친 크랜린의 마지막 말이다.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 가장 귀하고 가장 진실된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하는데도?" 이것은 자신을 떠나려는 친구에게 우회적으로 자신이 지우를 어떻게 여기는지 고백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디덜러스는 단호하다. "너는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

  

 

 

  

우리가 비정할 정도로 충분히 결연하고 자기창조에 민감하다면, 가족, 국가, 체계 모든 것과 단절을 성공적으로 선언했다면, 우리에게도 생긴다,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갈망을 탐지할 수 있는 자격이. 예컨대 우리는 이미 디덜러스에 앞서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적인 영감을 데몬démon’에게서 얻었다는 전승을 알고 있다. 예수 훨씬 이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에게 데몬은 당연히 기독교적 의미의 악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악령의 의미를 채색하기 전 지금은 잊힌 이 말의 원래 의의는 수호신, 정령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약간의 사악함과 관련한 어감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이 전승을 다시 해석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명력의 어떠한 부름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바람직한 철인, 유사 이래 모든 철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직관이 너무나 강력해서, 정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자기 생명에서 진정한 새로움을 끌어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그렇게 폭발시킨 진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씻기고 있는가! 

단, 그토록 광활한 새로움은 지하와 천상을 향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으리라. 조이스의 소크라테스인 디덜러스에게처럼.

 

 

그는 자기를 살살 피해 다니면서 흥분시키고 있는 그 가냘프고 실신하는 듯한 자태를 꼭 붙잡으려고 두 팔을 펼쳤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목구멍 속에 억눌러 두었던 부르짖음이 입으로 발산되었다. 그 부르짖음은 수난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들려 오는 절망의 비명처럼 그의 입에서 터져나와 분노에 찬 애원의 울음이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또한 사악한 자기 방기의 부르짖음이요, 어떤 변소의 질척한 벽 위에서 읽었던 음란한 낙서의 메아리에 불과한 부르짖음이기도 했다.”(156)

 

그는 나른한 졸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까풀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는데, 마치 대지와 대지를 지켜보는 천체의 광대한 회전 운동과 어떤 새 세상의 신기한 빛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의 영혼은 새 세상으로 정신 없이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 바닷속처럼 환상적이고 희미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는 구름 같은 형상과 존재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하나의 세계인가, 한 가닥 번뜩이는 빛인가, 아니면 한 송이 꽃인가?”(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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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앞의 주체가 있다. (‘선주체’). 이러한 영혼이 주체에 앞서 있다고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이것이 주체라는 것은 이 주체 앞의 주체 역시, 갇혀져 있는 지극히 자족적인 정념체, 아이다움으로는 남아있을망정, 인간이 대개 말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리는 자기의 상태는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아이다움은 프로이트가 상세히 밝히듯이 내면 가장 깊숙이 남아서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나를 내내 흔드는 것이다.(트라우마)

따라서 주체이기는 한 주체 앞의 주체는 자신으로서 자신이 아닌 것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 앞의 주체는 뒤에 더 강력히 상존할 단독자로서의 주체와는 다르다. 주체 앞의 주체는 ~을 만을 마주하고 있다. 주체가 목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렴풋이나마 이것은 어쩌면 기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렴풋하다.

주체 앞의 주체는 희미한 자신의 구체(具體)’(허연,불온한 검은 피)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을을 상()이 아니라, ‘()’이라고 말하여야 한다. image가 아니라 ‘aspect’라고 하여야 한다. 또 이것의 희미함만큼 우리는 이 주체 앞의 주체를, ‘이 아니라 언제나 무엇을지향하는 저 현상학적 주체라고 말하기를 주저해야만 한다. 그것이 퐁티가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이것은 기호학적 주체이다. 당연히 상에는 기호학적 스타일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주체 앞의 주체는 이 을을 발랑스를 다각화하면서 더 뚜렷이 상화할 수 있다(aspectualite). 발랑스는 희미한 자신의 구체표면을 점점이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의 껍데기를 뜻한다. 이 상은 아직까지는 양태 충전을 거치지 않아서 언어적 연쇄라는 깊이가 없으므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있다. 발랑스는 상을 상으로 있게 하는 것이기에, 상 그 자체이면서, 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굳이 발랑스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예컨대 발랑스란 시간, 공간 등일 수 있는데, 이것들을 철학, 심리학 등의 복잡한 논의 속에서 사유하지 않고, 일종의 포착으로, 그러니 기호의 발단으로 사유하기 위해서이다. 발랑스라는 말을 쓴다면 우리는 존재를 구성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대신에, 상을 구성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 있다.

주체 앞의 주체에게 가치란 어렴풋한 것이기에, 이 가치는 엄밀히 말해서 가치의 그림자에 대한 예감’(63)이다. 그리고는 즉시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치의 그림자에 대한 예감이란 그 자체로 다른 예감들 속에서 정향된 뒤에 튀어나오는 것일 텐데, 다른 정념이 아니라, 바로 그 예감들 속에 이것의 예감을 자리 잡게 하는, 그 예감들의 무게를 재는 가치들의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요소들, 즉 발랑스가 무엇인지를 답하여야 하는 것이다발랑스는 뒤에서 나올 기호사각형과도 깊은 관련이 없다.

그것과 관련이 되면 이것은 더는 예감이 아니라, 가치이다내가 지금 사과를 먹은 것과 아담이 사과를 먹은 것의 가치를 예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 사건을 예컨대 병렬된 등위의 시공간으로 다루면서 비교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두 사건의 발랑스를 맞추어 상화해서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발랑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가치에 대한 예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이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직 이 주체 앞의 주체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아니다, 말은 밝고 넓은 곳에 안주하면서 자신이 상화한 것을 편안하게 나타내는 그러한 바가. ‘아니다라는 것을 안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즉자는 영혼이라는 말보다, 존재라는 말로, 주체 앞의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라는 말로 불리어야 한다. 사실 그 전까지는 말이 그렇게 긴요하지도 않았다.

이 자리는 최초의 말이 어떻게 탄생되는 것인지 길게 말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주체 앞의 주체가, 주체가 되어서, 사람들, 그러니까 적들이 우글대는 동굴 안으로 돌아왔을 때, 특권적으로 맞본 자신의 정념을 서술할 어떤 기술이 필요해진다는 것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이때부터 주체 앞의 주체는 원초적 긴장성을 지닌 긴장주체로 요동의 시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팽팽하게 당겨진 주체에게서 말들이, 기호들이 튀어나오기(expression) 때문이다. 이 팽팽함 그 자체가 들로 가득찬 기억’(70)에 대한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베르그송은 아마 여기에 섬세한 견해를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호는 주체가 느꼈던 상들의 모방으로, 더 적절하게는 시뮬라크르들이다.

동굴 앞에는 주체가 만든 기호들이 그림자가 되어 너울거린다기호는 말이라고 하여도 좋다. 기호를 생성하는 주체는 기호들의 구별지음’(하이데거)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말이 어떤 상의 시뮬라르크인지 그는 매번 구별해낼 수 있다.

이것 그대로가 주체의 정의이기도 하며, 이것은 주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번 다른 시뮬라르크의 다른 작용 주체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갈라냄과 더불어 그 말들의 함께 속함도 귀결되어 나올 것이다. 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러니까 범주화가 분명해질수록, 말이 너울거리는 동굴 벽의 굴곡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갈라냄과 함께 속함은 주체 앞의 주체가, 주체가 되면서 뚜렷해진 두 가지 속성, ‘대자적 주체상호주체성으로 바꾸어 말해도 다르지 않다. 상태가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은, 달리말해, 놀이가 한껏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동굴벽에는 나만의 시뮬라르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각각 다른 말들이, ‘존재자의 시뮬라르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나는 내 말들의 양태들을 충전하거나, ‘범주화하거나 하는 식으로 기호학적 스타일을 만드는데, 이때 다른 사람의 기호는 배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그만큼 때로는 참고하기도 한다. 이 만들어진 기호학적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상이한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대화는 담화의 세계를 펼친다. ‘차이를 만드는 동시에 또한 교통할 수 있게 반복되는 기호의 특성은 도대체 무엇일까?(들뢰즈) 바로 이것들을 분석하려는 데에서 정념의 기호학이 탄생한다.

 

 

앞서서 너무나 단순하게 기호학적 스타일을 너울거림이라고 말하였지만 이 너울거림은 정념의 기호학 아래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분석될 수 있다. “창조하는 정신이 아무렇게나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데스튀트 드 트라시)

, ‘정념의 기호학은 이 서사통사론의 층위에서 정념의 분석에 직접접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이다. 정확히는 기호학적 제약의 놀이’(그레마스, 의미에 관하여, 179)이다. 기호사각형은 논리 의미론적 범주화의 산물로 반대, 모순, 함의 관계로 이루어진 사각형 꼴의 모델이다.”(18)

이 기호사각형은 여러 방식 변주될 수 있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현동화된 주체, 실현된 주체, 잠재화된 주체, 가능화된 주체라는 네 모서리로 이루어진 기호사각형이다. 정념의 기호학은 존재마저도 이렇게 양태화하고 있다. 무언가 어색하다. 이러한 딱딱한 사각형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담화의, 그리고 지속하는 존재의 일면이라는 것이 어색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담화의 층위가 더 익숙하지만, 기호사각형은 기호-서사 층위의 분석이기 때문이다. 둘은 어떤 관계일까?

 

 

담화 층위와 기호서사층위가 병존한다는 것은 기억의 기억에 대하여 암시하는 바가 있다. , 기억의 기억은 어떠한 형태로 있는가? 지금 나는 ~을이라는 영혼의 바라봄이 아니라, 영혼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우리가 가장 심원한 내면이라 간주한 기억의 기억에서 기호를 길러낸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그 역사와 상관없이 우리가 멋대로 공상하듯 기호자체가 우선 찔러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있다. 역사는 기억의 기억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수없는 되돌아봄과 나아감을 거쳐 몸을 얻고, 몸이 기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엮어진 것이다. 보통 여기서 우리는 착각한다. 기호가 그러하므로, 기억의 기억 자체도 당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파고들어가면 어떤 순서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착시 효과를 만든다.

기억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의 효과는 너무나 강렬하여 기호가 기억에서 이산화된 것임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든다. 실랍법으로 만든 생각하는사람은 밀랍 상태의 원형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우리 여기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생각하는사람에대한 바른 역사학이다.

기호가 놓인 나타남의 세계가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소위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세계이기에 우리는 기호의 내면조차도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기억이 뒤죽박죽되는 것을 경험했을 때의 정념이란, 부재가 자극한 일렬적인 순서에 대한 향수이지, 기억 자체의 산재에 대한 귀의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그나마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이산화되기 전 기억의 기억을 일깨운다. 나타남의 세계는 그럼에도 기억의 기억이 떠받치고 있는 세계이고, 이곳에 나타난 기호는 기억의 기억에서 떠 모은 것, 이산화한 것이다.

 

 

이산화되기 전의 기억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서사가 아니다. 기억의 기억은 분명 나타나 있는 것에 한해서 있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지만, 나타남이 따르는 일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이것은 무엇보다 자유이며, 기억의 기억은 영혼의 본령이라거나, 정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이것을 묘사해내는 것의 막막함이 나온다.

  일상어의 담화성을 아예 구겨지지는 않도록 섬세하게 들춰보면서 이 세계의 요동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생경해 보이는 관념에 이것은 둘러싸이게 된다.

지나치게 둘러싸여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하지 않으려면, 정념을 드러내려는 자, 그 정념이 해낸 일, 나타남의 세계를 끊임없이 소환해내야 한다. 이 소환해 놓은 것 속에서 기호-서사 층위와 담화의 층위의 관계를 다시 갈파하는 것이 정념 기호학자의 주요 업무이다.

 

 

기억의 기억의 바다는 요동친다. 요동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카오스가 기호가 되기까지 따르는 일정한 순서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기억은 순서없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기호 서사 층위로 이산화될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담화 층위로 튀어 올라서 이야기에서 까다로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윌리엄 포크너 작 소리와 분노1장에서 바보 캐디의 시점으로서 묘사된 뒤죽박죽의 내면을 읽어보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이산화를 조금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기억의 기억에서 기억을 만들 때에 중요한 것은 마인드맵을 그리듯이, 연쇄 고리의 끝을 잡아서 끌어올리는 작업이 아니다나는 계속 기억자체에는 그러한 순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기억의 기억을 떠 모으는 일은 고된 끊어내기의 작업으로 자신의 전과거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애써 선별해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연역하거나, 귀납하는 지성의 방식이 아니라, 감지하는 몸의 방식을 따른다. 기호의 가장 첫 등장은 일관된 논리의 엮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당연히 다른 감성의 만듦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엮을 것이 있은 후에나, 엮는 것이다. 만듦에서 애씀의 의미를 지워서는 절대 안 된다.

 

 

 

연속성의 계열과 불연속성의 계열 사이에서는 어떤 유비적 동질성에 따른 하나의 연결고리가 문제가 아니라 연속적인 선을 끊어내는 일종의 봉인의 문제이다. 비록 포착 효과에 의해 생성의 변조가 특정한 기호학적 스타일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직 연속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기호-서사 층위로 끌어오리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인 개입, 즉 봉인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산화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산화라는 작용은 감지(sommation, 감지(感知))에서 시작해서 범주화(categorisation)fh 귀결된다. 범주화가 의미론적 충전이 온전히 이루어진 단계라고 할 때, 감지는 그 전단계로서 특정한 하나의 위치만을 지정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감지라는 용어는 ‘sommation’의 대역어로 이 프랑스 원어에는 촉구, 독촉, 합계, 합산 등의 여러 의미가 들어 있으며, 특히 ‘som’이라는 접두어에는 신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기호학적으로 ‘sommation’‘resolution’과 한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감지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작용이 감각적 차원에 속한 선조건 층위와 지성적 차원에 속한 기호서사층위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감지라는 한국어대역어에는 감과 지라는 요소가 모두 들어 있어 이러한 매개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연속성의 계열과 불연속성의 계열을 잇는, 연속적인 흐름을 끊어냄으로써 불연속적인 조각들을 만들어내는 막중한 사명이 이제 감지라는 작용에 부여된 것이다.”(정념의 기호학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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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2015-10-3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트집잡는 것이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 - 해학으로 가득 찬 스피노자의 철학 동물원 철학 스케치 1
아리엘 수아미 지음, 강희경 옮김, 알리아 다발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과히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스피노자에게 흥미를 불러일킬 수 있게 만든 짧은 책. 단, 여기 성욕, 정욕으로 번역된 desir 는 다시 욕망으로 되돌려서 이해할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몹시 이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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