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앞의 주체가
있다.
(‘선주체’).
이러한 영혼이
주체에 앞서 있다고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이것이
주체라는 것은 이 주체 앞의 주체 역시,
갇혀져 있는
지극히 자족적인 정념체,
아이다움으로는
남아있을망정,
인간이 대개
말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리는 자기의 상태는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아이다움은 프로이트가 상세히
밝히듯이 내면 가장 깊숙이 남아서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나를 내내 흔드는 것이다.(트라우마)
따라서
주체이기는 한 주체 앞의 주체는 자신으로서 자신이 아닌 것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
앞의 주체는 뒤에 더 강력히 상존할 단독자로서의 주체와는 다르다.
주체 앞의
주체는 ~을 만을 마주하고
있다.
주체가 목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렴풋이나마 이것은 어쩌면 기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렴풋하다.
주체 앞의
주체는 ‘희미한 자신의
구체(具體)’(허연,『불온한 검은 피』)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을을 상(象)이 아니라,
‘상(相)’이라고 말하여야
한다.
image가
아니라 ‘aspect’라고 하여야 한다.
또 이것의
희미함만큼 우리는 이 주체 앞의 주체를,
‘을’이 아니라 언제나
‘무엇을’
지향하는 저
현상학적 주체라고 말하기를 주저해야만 한다.
그것이 퐁티가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이것은 기호학적
주체이다.
당연히 상에는
‘기호학적 스타일’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주체
앞의 주체는 이 을을 ‘발랑스’를 다각화하면서 더 뚜렷이 상화할 수
있다(aspectualite).
발랑스는
‘희미한 자신의
구체’
표면을 점점이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의 껍데기를 뜻한다.
이 상은
아직까지는 ‘양태 충전’을 거치지 않아서 언어적 연쇄라는
깊이가 없으므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있다.
발랑스는 상을
상으로 있게 하는 것이기에,
상 그
자체이면서,
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굳이
발랑스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예컨대 발랑스란
시간,
공간 등일 수
있는데,
이것들을
철학,
심리학 등의
복잡한 논의 속에서 사유하지 않고,
일종의
포착으로,
그러니 기호의
발단으로 사유하기 위해서이다.
발랑스라는 말을
쓴다면 우리는 존재를 구성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대신에,
상을 구성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 있다.
주체 앞의
주체에게 가치란 어렴풋한 것이기에,
이 가치는
엄밀히 말해서 ‘가치의 그림자에 대한
예감’(63)이다.
그리고는 즉시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치의 그림자에
대한 예감이란 그 자체로 다른 예감들 속에서 정향된 뒤에 튀어나오는 것일 텐데,
다른 정념이
아니라,
바로 그 예감들
속에 이것의 예감을 자리 잡게 하는,
그 예감들의
무게를 재는 가치들의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요소들,
즉 발랑스가
무엇인지를 답하여야 하는 것이다―발랑스는 뒤에서 나올 기호사각형과도
깊은 관련이 없다.
그것과 관련이
되면 이것은 더는 예감이 아니라,
가치이다―내가 지금 사과를 먹은 것과 아담이
사과를 먹은 것의 가치를 예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
사건을 예컨대 병렬된 등위의 시공간으로 다루면서 비교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두
사건의 발랑스를 맞추어 상화해서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발랑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가치에 대한
예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이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직 이 주체 앞의 주체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아니다,
말은 밝고 넓은
곳에 안주하면서 자신이 상화한 것을 편안하게 나타내는 그러한 바가.
‘아니다’라는 것을 안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즉자는
영혼이라는 말보다,
존재라는
말로,
주체 앞의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라는 말로 불리어야 한다.
사실 그
전까지는 말이 그렇게 긴요하지도 않았다.
이 자리는
최초의 말이 어떻게 탄생되는 것인지 길게 말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주체 앞의
주체가,
주체가
되어서,
사람들,
그러니까 적들이
우글대는 동굴 안으로 돌아왔을 때,
특권적으로 맞본
자신의 정념을 서술할 어떤 기술이 필요해진다는 것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이때부터 주체
앞의 주체는 ‘원초적 긴장성’을 지닌 ‘긴장주체’로 요동의 시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팽팽하게
당겨진 주체에게서 말들이,
기호들이
튀어나오기(expression)
때문이다.
이 팽팽함 그
자체가 ‘상’들로 가득찬 ‘기억’(70)에 대한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베르그송은 아마
여기에 섬세한 견해를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호는 주체가
느꼈던 상들의 모방으로,
더 적절하게는
‘시뮬라크르’들이다.
동굴 앞에는 주체가 만든 기호들이
그림자가 되어 너울거린다―기호는 말이라고 하여도
좋다.
기호를
‘생성하는 주체’는 기호들의 ‘구별지음’(하이데거)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말이 어떤
상의 시뮬라르크인지 그는 매번 구별해낼 수 있다.
이것 그대로가
주체의 정의이기도 하며,
이것은 주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번 다른 시뮬라르크의 다른 ‘작용 주체’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갈라냄과 더불어 그 말들의 함께 속함도 귀결되어 나올 것이다.
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러니까
‘범주화’가 분명해질수록,
말이 너울거리는
동굴 벽의 굴곡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갈라냄과 함께
속함은 주체 앞의 주체가,
주체가 되면서
뚜렷해진 두 가지 속성,
‘대자적
주체’와 ‘상호주체성’으로 바꾸어 말해도 다르지
않다.
상태가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은,
달리말해,
놀이가 한껏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동굴벽에는
나만의 시뮬라르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각각
다른 말들이,
‘존재자의
시뮬라르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나는
내 말들의 ‘양태’들을 충전하거나,
‘범주화’하거나 하는 식으로
‘기호학적 스타일’을 만드는데,
이때 다른
사람의 기호는 배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그만큼
때로는 참고하기도 한다.
이 만들어진
‘기호학적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상이한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대화는 ‘담화’의 세계를 펼친다.
‘차이’를 만드는 동시에 또한 교통할 수 있게
‘반복’되는 기호의 특성은 도대체
무엇일까?(들뢰즈)
바로 이것들을
분석하려는 데에서 ‘정념의 기호학’이 탄생한다.
앞서서 너무나 단순하게 기호학적
스타일을 ‘너울거림’이라고 말하였지만 이 너울거림은 정념의
기호학 아래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분석될 수 있다.
“창조하는
정신이 아무렇게나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데스튀트 드
트라시)
즉,
‘정념의
기호학’은 이 ‘서사통사론’의 층위에서 “정념의 분석에 직접접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이다.
정확히는
‘기호학적 제약의
놀이’(그레마스,
「의미에 관하여」,
179)이다.
기호사각형은
“논리 의미론적 범주화의 산물로
반대,
모순,
함의 관계로
이루어진 사각형 꼴의 모델이다.”(18)
이 기호사각형은
여러 방식 변주될 수 있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현동화된 주체,
실현된
주체,
잠재화된
주체,
가능화된
주체라는 네 모서리로 이루어진 기호사각형이다.
정념의 기호학은
존재마저도 이렇게 양태화하고 있다.
무언가
어색하다.
이러한 딱딱한
사각형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담화의,
그리고 지속하는
존재의 일면이라는 것이 어색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담화의 층위’가 더 익숙하지만,
기호사각형은
‘기호-서사 층위’의 분석이기
때문이다.
둘은 어떤
관계일까?
담화 층위와 기호서사층위가 병존한다는
것은 기억의 기억에 대하여 암시하는 바가 있다.
자,
기억의 기억은
어떠한 형태로 있는가?
지금 나는
~을이라는 영혼의 바라봄이
아니라,
영혼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우리가
가장 심원한 내면이라 간주한 기억의 기억에서 기호를 길러낸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그 역사와 상관없이 우리가 멋대로 공상하듯 기호자체가 우선 찔러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있다.
역사는 기억의
기억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수없는
되돌아봄과 나아감을 거쳐 몸을 얻고,
몸이 기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엮어진 것이다.
보통 여기서
우리는 착각한다.
기호가
그러하므로,
기억의 기억
자체도 당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파고들어가면 어떤 순서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착시 효과를 만든다.
기억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의
효과는 너무나 강렬하여 기호가 기억에서 ‘이산화’된 것임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든다. 실랍법으로 만든
생각하는사람은 밀랍 상태의 원형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우리 여기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생각하는사람에대한 바른 역사학이다.
기호가 놓인
나타남의 세계가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소위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세계이기에 우리는 기호의
내면조차도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기억이
뒤죽박죽되는 것을 경험했을 때의 정념이란,
부재가 자극한
일렬적인 순서에 대한 향수이지,
기억 자체의
산재에 대한 귀의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그나마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이산화’되기 전 기억의 기억을
일깨운다.
나타남의 세계는
그럼에도 기억의 기억이 떠받치고 있는 세계이고,
이곳에 나타난
기호는 기억의 기억에서 떠 모은 것,
즉
‘이산화’한 것이다.
‘이산화’되기 전의 기억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서사가 아니다.
기억의 기억은
분명 나타나 있는 것에 한해서 있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지만,
나타남이 따르는
일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이것은 무엇보다
자유이며,
기억의 기억은
영혼의 본령이라거나,
정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이것을 묘사해내는 것의 막막함이 나온다.
일상어의
담화성을 아예 구겨지지는 않도록 섬세하게 들춰보면서 이 세계의 요동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생경해 보이는
관념에 이것은 둘러싸이게 된다.
지나치게
둘러싸여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하지 않으려면,
정념을
드러내려는 자,
그 정념이 해낸
일,
나타남의 세계를
끊임없이 소환해내야 한다.
이 소환해 놓은
것 속에서 기호-서사 층위와 담화의 층위의 관계를 다시
갈파하는 것이 정념 기호학자의 주요 업무이다.
기억의 기억의 바다는
요동친다.
요동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카오스가
기호가 되기까지 따르는 일정한 순서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기억은
순서없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기호
서사 층위로 이산화될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담화 층위로 튀어 올라서 이야기에서 까다로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윌리엄 포크너 작 『소리와 분노』
1장에서 바보 캐디의 시점으로서 묘사된
뒤죽박죽의 내면을 읽어보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이산화’를 조금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기억의 기억에서
기억을 만들 때에 중요한 것은 마인드맵을 그리듯이,
연쇄 고리의
끝을 잡아서 끌어올리는 작업이 아니다―나는 계속 기억자체에는 그러한 순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기억의
기억을 떠 모으는 일은 고된 끊어내기의 작업으로 자신의 전과거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애써 선별해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연역하거나,
귀납하는 지성의
방식이 아니라,
감지하는 몸의
방식을 따른다.
기호의 가장 첫
등장은 일관된 논리의 엮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당연히 다른 감성의 만듦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엮을 것이 있은
후에나,
엮는
것이다.
만듦에서 애씀의
의미를 지워서는 절대 안 된다.
“연속성의 계열과 불연속성의 계열
사이에서는 어떤 유비적 동질성에 따른 하나의 연결고리가 문제가 아니라 연속적인 선을 끊어내는 일종의 봉인의 문제이다.
비록 포착
효과에 의해 생성의 변조가 특정한 기호학적 스타일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직
연속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기호-서사 층위로 끌어오리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인 개입,
즉 봉인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산화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산화라는
작용은 감지(sommation,
감지(感知))에서 시작해서
범주화(categorisation)fh
귀결된다.
범주화가
의미론적 충전이 온전히 이루어진 단계라고 할 때,
감지는 그
전단계로서 특정한 하나의 위치만을 지정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감지라는 용어는
‘sommation’의 대역어로 이 프랑스 원어에는
촉구,
독촉,
합계,
합산 등의 여러
의미가 들어 있으며,
특히
‘som’이라는 접두어에는 신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기호학적으로 ‘sommation’은 ‘resolution’과 한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감지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작용이 감각적 차원에 속한 선조건 층위와 지성적 차원에 속한 기호서사층위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감지라는
한국어대역어에는 감과 지라는 요소가 모두 들어 있어 이러한 매개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연속성의
계열과 불연속성의 계열을 잇는,
연속적인 흐름을
끊어냄으로써 불연속적인 조각들을 만들어내는 막중한 사명이 이제 감지라는 작용에 부여된 것이다.”(『정념의 기호학』해제
,
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