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 뉴욕의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를 탈출하다
데버라 펠드먼 지음,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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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종교가 일종의 허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이라는 초월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미생물로 시작해 영겁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환상적인 변이가 반복되어 만들어진 우연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패악질을 떠올려본다. 대다수 종교는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선한 기운으로 밝히고, 만물의 평화, 행복, 자유를 위해 힘써라 노래하지만 여기에는 괄호 하나가 빠져있다. ‘(내가 믿는 종교가 행하는 신성한 일은 제외하고)’, 라는 암묵적인 괄호.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권 탄압, 자유 침해, 고문, 약탈, 살인, 방화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반복됐다. 괄호의 힘이다. 모든 부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그 종교가 믿는 신의 말씀으로 정당화된다. 개인의 윤리의식와 도덕심을 강화하고, 거친 세상에서 인간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안함을 제공하는 종교의 순기능은 분명하지만, 빛에 대응하는 어둠처럼 악기능도 분명하다.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는 극단적 유대교 종파(사트마)를 믿는 공동체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데버라 펠드먼)이 공동체 울타리를 걷어 차고 세상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일들을 세밀하게 기록해놓은 책이다. 저자는 유대인이다. 히틀러 시대의 노골적인 탄압이 아니더라도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여러 민족으로부터 배척당하고 탄압당해왔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공동체가 믿는 유대교 사트마 종파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외부와 소통하는 방법 대신 내부를 결속하고 공동체만으로 삶 전체를 꾸리는 방법을 택했다.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트마의 울타리를 건너가는 이들은 이단으로 불렸다. 저자는 공동체 안에서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가족끼리 포옹이나 키스를 하지 않았다. 서로 칭찬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는 서로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언제든지 누군가의 영적 결함이나 신체적 결점을 지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큰어머니는 바로 이것이 올바른 측은지심이라고 말했다.’

 

사트마 파는 구성원들의 개인 욕구를 최대한 억누르고, 생활 전반에 유무형의 단단한 벽을 둘러쳐 통제를 가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하면 안되는 것들로 가득한 교리는 모순이 가득했지만,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신성에 대한 모독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디시어로 쓰인 책만 읽기를 바라셨다. 전설적인 차딕이 기도와 신앙의 힘으로 뻔한 기적을 행하는 이야기가 20쪽쯤 이어지다가 촌스러운 삽화가 나오는 책 말이다.’

 

‘과거 유럽에서 할아버지의 가족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그들은 극단주의자가 아니었다. 나의 조상은 나무 마루에 페르시안 카펫을 깐 집에서 살던 지식인이었고 유럽대륙을 자유롭게 여행했다. 영어로 된 책을 읽거나 붉은색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한 사람도 지금의 렙베이다. 렙베는 우리가 외부와 동화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고립시켰다.’

 

‘할아버지는 영어는 영혼에 스며드는 독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어를 읽고 말할 때마다 영혼이 더럽혀져서 더 이상 신성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신이 허락하신 우리 조상의 언어인 이디시어로만 말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하지만 이디시어는 독일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그 밖의 다양한 지역어가 섞인 언어의 잡탕이다. 이 중 대부분은 한 때 영어와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언어였다. 그런 이디시어가 어떻게 갑자기 순수하고 지당한 언어가 되었단 말인가.’

 

놀랍게도(혹은 당연하게도) 여기서도 여성은 훨씬 가혹한 억압의 대상이 된다. 오래된 옷을 입고, 머리는 삭발하고, 생면부지의 사람과 결혼을 하고, (종족보존 및 번영을 위해)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등이다. 끝도 없는 집안일에 대한 전적인 의무는 덤이다. 저자는 불합리한 규제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견딜 수 없었고 어린 아이와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이 책은 2020년 올해의 책이라 불려 마땅한 《배움의 발견》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어디까지 가둬두고 억압할 수 있는지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단단한 자아로 억압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저자들의 용기있는 결단에 있어서도 그렇다. 저자는 필연적으로 울타리를 넘어섰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낯선 시작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큰 법이다. 통제와 억압에 맞서 용감히 자신의 선택을 한 저자의 앞날이 어떨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그는 자유로울 것이다.(오랜 시간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공동체 역시 통제와 억압의 방식으로 꾸려나간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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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 버락 오바마 대통령 회고록 1
버락 H. 오바마 지음, 노승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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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양질의 음식을 충분히 먹을 수 있고 , 아프면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고, 하고자 한다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 그런 곳이 제가 살아가는 세상이길 바랍니다.

- 그럼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게 무엇이든 제 직업입니다.

     

약속의 땅은 자신의 꿈에 대해 위와 같이 답할 사람, 어떻게든 세상을 한 뼘쯤 나아지게 만들고 싶었던 사람, 버락 오바마 전미 대통령의 자서전이다. 이 자서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아시아와 하와이 등에서 성장해 세계대통령으로 불리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임기 3년여를 보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자라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아버지는 그의 인생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간의 선함이 결국 이긴다고 버락에게 늘 강조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버락은 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데다, 여러 국가에서 성장한 까닭에 항상 떠도는 느낌을 받았던 그는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서도 일찍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주장하든, 남을 괴롭히고 속이고 잘난 체하는 이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어머니가 보기에 선량하고 예의 바른 이들은 큰 곤욕을 치렀다. 이 모든 경험은 나를 제각각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20대에 들어선 버락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조금씩 지금 세상을 안전하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옮겨 놓고 싶어했다. 우리는 잘 안다. 이런 꿈을 꾸는 자에게는 생각보다 세상이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마음 모퉁이에서는 멋지군감탄할 수 있어도 간단한 계산을 통해(세상이 돌아가는 냉정한 규칙을 통해) ‘저건 삽질이야손 쉽게 결론내린다는 것을. 어떤이는 망상이라 비꼬았을 거고, 어떤이는 허풍쟁이라 웃어댔을 것이다. 버락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인상 좀 펴고 살아 버락. 넌 너무 이상주의적이야. 대단한 일이지만, 네 말이 정말로 가능한지 모르겠어.‘ 나는 이런 목소리들에 저항했다. 그들이 옳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으로 대표되는 기업? 아니다. 단 번에 판을 엎어버리는 전쟁? 역시 아니다. 가장 가까운 답은 아마 정치일 것이다. 매일 여당, 야당 편 갈라 치고 받으며, 제 이권만을 위해 아귀다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한심한 정치가 가장 쉽고(?) 빠르게 세상을 바꾸는 마법의 도구다. 그러고 보면 버락이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이었을 것이다. 풀뿌리 운동 활동가로 살아가다 숙명처럼 정치에 뛰어든 버락은 일리노이주 상원, 연방 상원을 거쳐 마침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것도 그의 40대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정치는 주고 받는 것이다. 약을 얻기 위해 독을 삼키기도 해야 한다. 큰 것을 얻기 위해 다른 큰 것을 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러라고 널 위해 운동한 것이 아닌데!!!’ 우리 편한테 흠씬 욕을 얻어먹을 각오도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이로운 법안이 (주고받다보니) 누더기가 되고, (또 주고받다보니) 악법이 계속 생명령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정치다. 일리노이주 상원 시절의 일화에 버락이 겪는 정치의 좋은 예가 나온다. 어느 날 내가 발의한 법안이 불쏘시개로 버려지고 나서 의사당 홀에 서 있는데 사람 좋은 로비스트 하나가 다가와 내게 팔을 둘렀다. “벽에 머리 찧는 짓은 그만둬요 버락. 여기서 살아남는 열쇠는 이것이 비즈니스라는 걸 이해하는 거에요 차를 파는 것처럼요. 길가 세탁소일 수도 있고요. 그 이상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미쳐버릴 거에요”’

     

정치는 돈이다. 정치인으로 세상에 나서기 위해서는 자본력은 필수다. 현재의 미국 정치인은 돈이 없으면 당선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대형 쇼라서 감당하지 못하는 자, 입장권조차 살 수 없다. 버락의 언론 컨설턴트가 대놓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이상주의는 감동적이에요 버락. 하지만 그걸 TV에 내보내서 사람들이 듣게 하려면 500만 달러가 필요하고, 그 돈을 모으지 못하면 기회는 없어요.’ 이렇듯 정치는 돈이면서 또한 미디어 플레이다. (돈과 이슈 선점으로) 미디어를 장악하는자가 선거를 장악한다. 버락의 대통령 선거운동 전 시기만 해도 뉴미디어(SNS)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아니, 영향력을 중요치 않게 바라봤다. 버락이야말로 거의 최초로 뉴미디어가 가진 힘을 온전히 선거에 쏟아부은 대통령 후보이다. 점선면으로 끝없이 확장하는 뉴미디어는 저인망처럼 미국 사회 곳곳을 휘저어 버락의 호감도와 지지도를 끌어올렸고, 소액 선거자금이 폭발적으로 그의 대선캠프에 몰려오게 만들었다. 그 역시 인정한다. 뉴미디어가 가진 힘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다. 미디어 플레이, 그 중에서도 뉴미디어 플레이는 결코 한 집단에만 계속 사탕을 건네는 치트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되려 넉넉한 자본력에 인력 동원력을 갖춘 자들(공화당)이 이 기술을 훨씬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내가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 뉴미디어 기술이 얼마나 융통성이 큰지, 얼마나 빨리 상업적 이익에 흡수되어 기득권층이 활용할 수 있는지,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데뿐 아니라 분열시키는 데도 얼마나 쉽게 악용될 수 있는지, 나를 백악관에 데려다준 바로 이 도구들의 상당수가 어떻게 언젠가 내가 대변하는 모든 것에 맞서 쓰일 수 있는지였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 마치 잘 만들어진 미국 드라마처럼 넘어간다. 그가 생각하는 인권, 교육, 전쟁, 경제,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세계, 그의 모든 가치가 주제별로 책에 빼곡이 담겨있다. 자본과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단단한 편가르기에(민주당과 공화당,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3세계 등) 진저리를 치지만, 선한 한걸음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여전히 뿌리 깊은 나무다. 만약, 그의 두 번째 임기까지 포함햇다면 아마 2천페이지는 넘었을 것이지만(혹시 2권이 준비중인가....) 이 책 한권으로도 버락을 읽어내기에는 충분하다. 미국의 일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일이 지구의 일이 된지 오래. 미국의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해보기에 이 책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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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물에 대하여 - 2022 우수환경도서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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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점쳐보자.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마음으로는 유토피아에 한 표 던진다. 눈부신 기술 발전에 따른 과실을 인류가 넉넉히 나누며 무탈한 매일을 보내는 삶. 생각만 해도 오후 햇살 아래 드러누운 나른한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이 점괘가, 큰 재산을 판돈으로 걸고 진행하는 도박이라면 마음이 순식간에 바뀐다. 올인해서 디스토피아에 한 표. 필요하다면 손모가지도 하나 추가.

 

역사에 따르면 1600년대에도 이상기후가 조선을 덮쳐 큰 기근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지만 지금은 이상기후가 일상이 된 시대다. 늘 이상하니까 이상기후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상이 일상이 되니 이상기후가 정상기후다. 그에 발맞춰 지구환경도 성실히 파괴되고 있다. 하늘이란건 본디 이렇게 적당히 뿌연 것이고, 아무리 깨끗해보여도 냇물이나 계곡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다.(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상식!) 세상을 공유하던 생물들이 하나씩 소멸해도 딱히 대수롭지 않다. 반딧불이는 멸종된 공룡처럼 되어버렸고, 애국가 속 소나무는 평균기온 상승으로 꾸준히 산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다음은 뭘까,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오염된 지구 환경을 견디지 못하는 생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고양이나 강아지가 전멸하면 모를까, 대다수 생명의 소멸은 내가 알아채지도 못할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는 꽤 스산한 일이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들에 대해, 인류의 횡포와 부채에 대해, 인류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환경파괴로 무너질 세상을 체제 붕괴에 빗대 설명한다. 체제가 무너질 때는 단단히 묶여 있던 사슬에서 언어가 풀려나온다. 현실을 담아야 할 언어들이 허공을 떠돌며 더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못한다. 교과서는 하룻밤 새 구판이 되며, 정교하기 그지없던 체계가 허물어진다. 문득 올바른 문구를 떠올리기가, 현실에 부합하는 관념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어진다.’ 모든 것은 과거의 유물이 되고, 새 세상을 설명할 적확한 언어와 체계는 재구성되지 않은 암울한 미래의 표현이다.

 

인류가 절대적 악의(惡意)를 품고 지구를 오염시킨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 별일 있을까라는 무지, 적당한 파괴는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 이런 사고가 뭉쳐져 계속 구르다보니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까? 저자는 말한다. ‘20세기의 주요 이념들은 땅과 자연을 값싸고 무한한 원자재로 간주했다. 인류는 대기가 배출가스를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대양이 쉬지 않고 폐기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대지가 비료만 주면 끝없이 재생할 수 있고, 인간이 점점 많은 공간을 점유하면 동물은 계속해서 딴 데로 이동할 것이라 생각했다.’ 인류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을 가정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유는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먼 미래를 그려내지 못한다. 다음주 날씨조차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데 10, 100년 후를 상상하는건 아득한 일이다. 단호한 주장으로도, 암울한 시뮬레이션으로도 쉬이 설득되지 않는다. 오늘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대체로 무심할 따름이다.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내비친다. 과학자들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논쟁하고 추측하면서 미래에 대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슈퍼컴퓨터로 복잡한 모형을 돌려 2050, 2070, 2090년에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연도에 공감하거나 반응하기가 힘들다. 우리에게 100년은 영원과 같아서 상상을 뛰어넘는다. 100년이 하도 오랜 시간으로 느껴져, 지금의 추세가 계속되면 2100년에 엄청난 재앙이 벌어질 것임을 과학자들이 입증해도 우리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날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저자의 나라, 아름다운 아이슬란드를 주로 다룬다.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여전히 아름다운 나라가 꾸준히 오염되어가는 과정을 적어놓았는데, 아이슬란드에 대한 애정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전해진다. 저자는 변해가는 아이슬란드의 시간을 본인의 가족을 통해 투영해낸다. 어른들의 기억과 빛바랜 사진들, 자녀와의 대화로 풀어내는 아이슬란드의 변화는 증조할머니부터 부모님 세대까지가 추억하는 (깨끗했던) 아이슬란드부터 저자와 자녀가 살아가는 현재의 (환경 파괴중인) 아이슬란드까지 이어진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환경파괴와 환경보호를 말하는 책이지만 문장이 아름답고 묘사가 뛰어나 우아한 에세이처럼 읽힌다.

 

우리는 이어져 있다. 시계열로 이어져 있다. 과거가 현재고, 현재는 미래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국 하나의 묶음이다. 저자가 자녀가 시간에 대해 나누는 눈부신 이야기가 있다. 지금 2018년이지? 증조할머니가 1924년에 태어나셨으면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지? (: 아흔 넷) 그럼 넌 언제 아흔넷이 될까? (: 2008년에 태어났으니까 2102) 어쩌면 네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처럼 2102년에도 너의 열 살배기 증손녀가 찾아와 이 부엌에 함께 앉아 있을지도 몰라. 계산 한 번 더 해볼까? 네 증손녀는 언제 아흔넷이 될까? (: 2092년에 태어났으면 2186!!) 그래. 상상할 수 있겠어? 2008년에 태어난 네가 2186년에도 살아 있을 아이를 알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마지막 문제야. 1924년에서 2186년까지 전부 몇 년일까? (: 262) 상상해보렴.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네가 알게 될, 네가 사랑할, 네가 빚어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고, 너의 맨손으로 262년을 만질 수 있어. 너는 손녀에게 가르칠거야. 2186년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것이다. 우리는 2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막연히 그려보는 미래가 아닌, 나와 직접 연결된 미래다. 그래서 우린 환경 파괴를 멈추어야 하고, 생명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자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흥미진진한 시대를 살아가시길

 

* 직접 구매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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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
대니얼 코일 지음, 박지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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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비슷한 레벨에 올라온 사람들로 조직을 꾸렸는데 유독 돋보이는 부서를 발견할 때가 있다.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끼리(지역본부 간) 비교할 때 그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지역 성향 차이인가, 업무를 주도하는 관리자급 이상 직원들의 기질 때문인가, 궁금했다. 여전히 그 답은 찾지 못했지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업무 문화에 열쇠가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는 내가 가진 의문에 질문과 답을 동시에 안겨준 책이다. 이 책은 잘 되는 조직의 특성에 대해 정말 다양한 사례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먼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조직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반대로 행하면 제대로 기름칠한 매끄러운 조직이 될 수도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성과가 떨어지는 조직은 3가지 유형의 직원이 집 모서리의 곰팡이처럼 끼어 있다. ①공격적이고 도전적인 훼방꾼 jerk, ②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slacker, ③무기력하고 풀죽은 downer. 책에서는 한 명의 참가자에게 위 세가지 유형 중 아무 유형이나 선택해 근무하고, 회의에 참석하라고 요청하는 실험을 한다. 결론은? 공격적이든, 게으르든, 무기력하든 뭐든 하나만 해도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조직의 성과가 평균 30~40%가량 떨어졌다. 단 한 사람이 뿌려대는 독이 주변 동료들까지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조직이 살아나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훼방꾼을 개과천선 시키거나, 도려내 버리거나. 책에서 언급했듯 ‘그 어떤 얼간이라도 외양간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외양간을 다시 세우려면 뛰어난 목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사에 빈정대고, (스스로는) 쿨한 척 업무에 냉소적인 직원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기질은 생각보다 따라하기 쉬워서 순식간에 조직 전체로 퍼질 수 있다. 일상 방역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럼, 한 몸처럼 움직이고 부분의 합보다 큰 성과를 달성하는 조직은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을까. 직원들에게, 가족을 생각하듯 애사심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조직일까. 빈정거리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일하라며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조직일까. 설마. 직원들은 순진하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다. 그런 입바른 소리와 강압적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직원은 없다. 경영자들이 AI처럼 내뱉는 잡소리에 감흥할 리도 없다. 애사심은 회사 주인만 갖고 있는 이기적 욕망일 뿐이다. 결국 잘 되는 조직은 관리자급 이상 직원들의 철학과 솔선수범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어져 있는가, 우리는 안전한가, 우리는 미래를 공유하는가.’ 나와 동료가 이어져 있고, 부득이하게 상황에서 조직이 날 적극적으로 보호해주고, 우리 조직의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것, 그 문화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조직은 다음 레벨로 이동한다. 물론, 그럴 수 있도록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오롯이 관리자(경영자)들의 몫이다. 제발 직원들의 솔선수범에 대한 희망은 머릿속에서 냅다 차버리면 좋겠다.

 

책 속 사례를 들어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①직원들이 편하게 서로 끊임없이 부딪힐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고급 커피 머신이 비치된 널찍한 테이블의 아늑한 휴게실 같은.), ②고위직일수록 청소하고, 쓰레기 줍는 등의 허드렛일을 먼저 하는 것(저자는 이것을 ‘강력한 겸손’이라고 정의한다.). ③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웃음. 구성원들간 벽 없는 웃음을 지속시키는 유쾌한 분위기 조성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별것이다. 휴게실에서 웃고 즐거워하는 직원들을 보며 ‘창의적인 시간을 보내는군’, 흐뭇해할 관리자가 몇이나 될까. 열에 아홉은 월급 받고 논다고 역정내며 얼른 자리로 돌아가 일하라고 다그칠 것이다. 제자리 청소라도 제대로 하는 관리자 역시 드물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 조직 문화는 결국 관리자들의 철학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직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상사가 지켜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원들도 윗사람을 늘 지켜보고 평가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함께 있다’라는 더욱 크고 강력한 신호를 서로에게 전달하기를 원한다면, 이 책의 사례를 참고해보면 좋겠다.

* 직접 구매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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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해야 뭐라도 하지 -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는 선택의 심리학
네모토 히로유키 지음, 김슬기 옮김 / 유노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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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난이도 높은 감정 노동이다. 많은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도, Go와 Stop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선택을 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를 오롯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결정=선택=책임’의 공식이다. 그럼 결정내리는 것은 왜 어려울까? 객관식 문제에서 답 찾는 것을 결정이라 하지는 않는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결정 사항에는 정답이 없다. 주어진 자료와 주변 상황, 내 역량(성향)을 고려해 판단할 뿐이다. 여러 개의 길이 뻗어 있는 교차로에서 어디로 발걸음을 내딛을지 모르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길마다 여정도 다르고 종착지도 다를 것이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 어떤 과실이 있을지, 여정이 얼마나 길고 짧을지도 알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교차로에서 발이 묶인 채 신중함과, 우유부단함이 뒤섞여 섣불리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결정이 어려운 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 결정에 따른 미래를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하지 않은 선택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정을 해야 뭐라도 하지》는 우리의 선택이 왜 불만족스러운지,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나를 정확히 알고, 제대로 된 결정을 통해 인생을 확신으로 채우는 방법을 제시하는 안내서다. 스스로 내리는 결정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변 사람이 반대하거나 전례가 없어도 자기 뜻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삽니다. 선택지가 무수해진 현 시대에는 인내심보다 ‘내 뜻을 관철하는 강인함’이 요구됩니다. 과거의 데이터에서 이론적인 답을 얻는 것은 이제 인공지능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가는 대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맞아도, 틀려도, 행복이 몰려와도, 불행이 덮쳐와도, 내가 직접 내린 결정에는 변명이 없다. 원망할 대상도, 방향 잃은 분노도 없다. 그냥 다 내 덕이고, 내 탓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짜릿해하고, 누군가는 무서워한다.

 

저자는, 결정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머리와 마음의 불일치라고 말한다. 현재 의식에 따른 결정과 잠재 의식에 따른 결정이 다르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머리로 하는 결정’과 ‘마음으로 하는 결정’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예를 든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 없나요? 더러운 책상 정리해야 하는데 하기 싫어. 다이어트 중인데 나도 모르게 군것질을 해 버렸네.” 머리는 책상 정리와 다이어트를 외치지만, 마음이 싫어, 싫어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는 결정을 못 내린다고 한다.

 

이렇게 결정을 못하는 인간에는 몇 가지 유형이 나타나는데 그 종류는 이렇다.

 

생각이 너무 많아 결정하지 못한다_사고 우위 유형

실수하면 어떡하지_완벽주의 유형

뭐가 정답일까_정답주의 유형

나는 착한 아이다_우등생 유형

갈등이 싫다_평화주의자 유형

 

서두에 언급한 ‘결정=선택=책임’ 공식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아마 책임이 아닐까. 결정과 선택은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책임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책임만 없다면 과감한 결정과 파격적인 선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절대 죽지 않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계속 새로 고침하며 결정과 선택을 반복할 수 있다. 문제는 책임이다. 책임에 대해 저자는 “흔히 ‘책임은 무거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심리학에서는 책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바로 ‘책임은 지는 것이 아니라 지고 싶지 않은 것’으로 말이죠.”라고 설명한다. 지고 싶지 않은 책임을 100% 내가 다 이고, 지고 해야 하는 것, 그게 결정의 핵심이다.

 

오늘도 나는 결정해야 할 여러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건도 있고, 길 자체가 희미한 건도 있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교통정리 안되는 건도 있다. 마감을 알리는 종소리가 곧 울릴 텐데 큰일이다. 이때의 노하우. 최대한 버티고, 미루고, 괴로워하면 괴로운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는 것. 벼랑 끝에서 내리는 결정이 최고더라.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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