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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고, 세우고, 지키기
이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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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면 잡무를 해야할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복사용지 갈기, 커피 채우기, 생수 교체하기 등 자잘하지만 사무실 운영을 위해 누군가는 해줘야 할 잡무도 있지만 전혀 의미없는 잡무도 종종 발생한다. 대표적인 게 회의다. 특정 현안이나 여럿의 의견을 묶어 신중히 결정해야 할 사안에 대한 회의는 예외다. 이런 회의는 필수적이며 조직의 미래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회의가 너무 많다. 회의라 적고 잡담이라 읽으면 딱 맞을 그런 회의들이 근무시간을 좀 먹는다. 옆 부서나 상사에 대한 험담, 특정 직원에 대한 뒷담화, 자잘한 개인 가정사, 어제의 스포츠 및 드라마 결과까지 할 수 있는 얘기는 끝이 없다. 업무에 대한 얘기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담당자만 불러 물어보고 정리하면 끝날 것들까지 팀원 전원을 모아놓고 질질 끌어가며 진을 빼놓는 회의가 부지기수다. 그럼 이런 회의를 왜 하는 것일까.  부서장 혹은 중간관리자는 그걸 중요한 회사 업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업무분장상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저런 회의를 함으로써 오늘도 열심히 일했다는 자기만족을 가지는 것이다.

 

회의뿐만이 아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커지지 않더라도 오래된 조직일수록 쓸데없는 일들이 직원 개인들에게 들러붙는다. 두, 세단계면 끝날 결재사항도 이사람 저사람의 사정을 봐주고 서로간 책임도 적절히 회피하기 위해 다섯, 여섯단계로 늘어난다. 대화 한번이면 해결될 업무도 부서간 회의, 공식적 문서 교환, 책임소재 정리까지 여러 고개를 넘어야 완료된다. 전형적인 비효율 조직이 탄생하는 것이다. 얄팍하나마 내가 가진 (무의미한) 권한을 버리기 싫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어 그의 (무의미한) 권한에 대해 언급할 수도 없으니 kTX로 한시간이만 도착할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돌며 며칠을 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 단순화하고 버릴 것들을 버리지 못해 발생하는 일이다. 심각한 것은 이런 비효율은 내성이 강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콘크리트벽처럼 단단히 굳어져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기업이라는 몸체에 동맥경화를 가져오게 되며 이는 비용 상승, 수익 하락으로 연결돼 기업의 존립기반을 흔들기도 한다.

 

책 <단>은 이런 조직의 비효율적인 복잡함을 최대한 덜어내고, 남아 있는 핵심기반을 최대한 튼튼히 세운 뒤 그것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에 대한 글이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어떻게 세우며 지킬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채우기 위해서는 일단 버려야 한다. 진정한 채움은 더할 게 없는 순간이 아닌,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경영서로도, 자기계발서로도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 이해하기 쉽고 빠져드는 사례들이 너무 많아 한 번 책을 펼치면 어렵지 않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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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신 - 토크계의 전설 래리 킹에게 배우는 말하기의 모든 것
래리 킹 지음, 강서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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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상한 표현이지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대화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속담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는 필수다. 메아리 없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이가 아님에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대화는 나를 표현하고 생각을 표출하는 수단이다. 오해를 풀고, 신뢰를 굳게 하는 도구다. 나를 드러내고 홍보하는 광고이기도 하고 나를 숨기고 타인이 착각하게 만드는 트릭이기도 하다. 이렇듯 대화는 내가 나이게 하는, 타인들이 나를 규정짓게 하는 중요한 표현방식이다.

 

  대화의 특징은 쌍방향 소통에 있다. 물론, 일방적인 자기 주장을 쉬지 않고 쏟아내 놓고 훌륭한 대화였다며 포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외로 아주 많다. 이들은 대화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다. 일방적 주장은 언어 배설일 뿐 대화가 아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쌍방 소통이다. 그것을 잘해내기 위해서는 듣기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잡담이 아닌 진지한 주제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 결론을 도출해 내는 대화라면 특히 그렇다. 만약 대화가 상대방을 설득해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정말 잘 들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 게 무엇인지 인지하기 위해 듣기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대화는 이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 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대화를 나눈다. 이해의 대화는 솔직해야 한다. 솔직하고 진실된 태도로 소통하면 결국 상대도 날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열게 된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꾸미지 않고, 거짓부리지 않는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진솔한 대화가 오가다 보면 서로 공감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래리킹은 자타공인 최고의 진행자다. 대화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 살아온 이 답게 대화에 관련된 그의 지식과 경험은 끝이 없다. 그렇게 갈고 닦아온 그만의 업무기밀이 이 책 <대화의 신>에 빼곡히 적혀 있다. 물론 책 내용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50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의 노하우가 책 한권에 오롯이 담기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년의 경험을 270페이지에 녹여넣은 만큼 순도 높은 책이기도 하다. 상대방과 계속 눈을 맞춰야 한다거나, 솔직해야 한다거나, 질문만 잘해도 대화수준이 높아진다와 같이 누구나 알 법한 얘기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기본이 모든 것이다. 책을 읽고 한 번쯤 대화의 참 맛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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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7 14: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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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실패
로저 로웬스타인 지음, 이승욱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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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CM이라는 단어를 읽고 이거 무슨 암호야? 한다면 경제학, 경영학 분야 전공자가 아닐 것이다. 반면  LTCM을 한때 월스트리트를 주름잡았으나 폭삭 망해버린 헤지펀드 명으로 기억한다면 최소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LTCM(Long-Term Capital Management)는 1990년대 중반 월스트리트에 혜성같이 나타나 수년간 업계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나 러시아와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터지던 시기 무리한 차입투자를 일삼다 한 순간에 망해버린 헤지펀드다. 헤지펀드는 일반 뮤추얼펀드 등과 달리 소수의 고액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위험하나 수익성이 뛰어난 주식, 채권, 특히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신탁이다. 고위험 고수익을 쫓고 수익률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원금의 수배 많게는 수십배에 달하는 자금을 차입해 공격적인 투자를 일삼기에 흥할땐 더할 나위 없이 흥하나 망할 땐 믿기 힘들 정도로 한 순간에 나락 끝까지 떨어진다. 현재까지 운영되는 가장 유명한 헤지펀드는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펀드다. 그러나 과거(1990년대)를 포함한다면, 가장 유명하고 화려했으며 더 이상 오를 곳 없이 비상하다 정말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린, 헤지펀드의 장점과 단점, 흥망성쇠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펀드는 단언컨데 LTCM이다. LTCM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양초날개가 녹아 추락해버린 이카루스와 닮았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 살로먼에는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투자자 존 메리웨더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채권투자부서를 진두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 곳은 그와 그가 고용한 우수한 인재들이 살로먼의 수익 대부분을 벌어주고 있던 핵심부서였다. 그러나 메리웨더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최고 경영진 진입을 눈앞에 둔 순간 본인과 별로 관련없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회사에 복귀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오랜 기간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헤지펀드를 직접 만들게 되는데 그게 바로 LTCM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월스트리트라는 과학, 수학보다 펀드매니저들의 직감에 의한 투자가 대세를 이루던 곳이었다. 그런 게임장에 메리웨더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가지고 참가했다. 그것은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투자형태로, 최대한의 데이터를 긁어모아 정교한 수학공식을 통해 철저히 분석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투자 리스크를 최소화, 심지어는 없애버리려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 금융경제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두 원칙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그 어떤 펀드보다 이 두 가지를 철저히 따랐다. 또한, 이런 류의 스타일로 펀드를 운여하기 위해선 해당분야 전문가가 필요했기에 수학자들을 위시로 한 많은 인재들을 영입했다. 그가 모은 대표적인 인재로는 하버드대학 교수 로센펠드, 런던 대학 재정학 석사 학위자 빅터 하가니, MIT 금융경제학 박사학위자 그레고리 호킨스, MIT 경제학 박사학위자 윌리엄 크래스커, MIT에서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로렌스 힐리브랜드, 하버드 교수 로버트 머턴, 저 유명한 블랙-숄스 옵션가격결정모형을 만들어낸 노벨상수상자 마이런 숄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다음가는 제2인자 데이비드 뮬린스가 있다. 이런 먹물들을(그러나 지나치게 똑똑하며 화려하고 유명한 두뇌들을) 거느리고 월스트리트에 나타난리웨더의 LTCM은 곧 월스트리트를 장악해버렸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모든 채권의 과거 가격을 컴퓨터에 입력했고 그 가격들이 미래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모델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수년간 믿기지 않을 만큼의 수익을 거두며 월스트리의 존경과 시샘을 한몸에 받았다. 그들에게 실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고 그들의 예언은 곧 확신이자 현실이 되었으며 월스트리트 그 누구도 그런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던 한에서만큼은.

 

  LTCM의 기본적인 채권투자전략은 채권가격의 스프레드를 이용해 저위험 혹은 무위험 차익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스프레드 범위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모델을 고안했다. 이 범위라는 것이 소숫점 이하일 정도로 차이가 미비했지만 해결방안은 있었다. 최대한의 차입을 통해 레버리지를 (가급적 무한히) 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위험성이 적고 수익 또한 적은 투자라 하더라도 워낙 투자단위가 크다 보니 막대한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그들은 그 방식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자 배부른 문제가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유명세였고 그로 인한 투자금액이었다. 시장에 뛰어 들었던 초창기를 지나 펀드가 업계 전체 NO.1이 되어 유명해진 뒤로 막대한 투자액이 펀드에 몰려들었다. 기존의 투자액과 수익, 신규 투자액, 차입액을 더하니 LTCM이 투자해야 할 자본은 100조원이 넘어버렸다.(1990년대에!!). 그런데 시장의 크기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자신만만해 하던 채권시장은 점점 건져먹을 수 있는 파이조각이 줄어들고 있었다. 수익을 낼 곳은 점점 사라져가나 유명했던 만큼이나 수익률이 중요했던 그들은 조금씩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잘 알지 못하던 주식시장, 파생상품 시장에까지 무리하게 뛰어든 것이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그들이 성경처럼 맹신하던 리스크최소화 수학모델이 채권시장 외에도 충분히 먹혀들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오산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입력된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었는데 그 채권가격결정모델은 주식과 기타 파생상품엔 먹혀들지 않았다. (어쩌면 운이 좋았을 뿐, 종국에는 채권시장에서도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과거를 통한 미래 예측이 늘 맞을거라는 믿음은 황당한 이론일 뿐이니까.) 그리고 1997년, 우리에게도 IMF로 잘 알려져 있는 최악의 아시아 금융위기에 LTCM은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댓가를 톡톡히 치뤘다. 그들의 모든 투자는 죄다 실패해버렸고 100조원이 넘던 자본금이 불과 몇 달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LTCM의 부도는 월스트리트를 넘어 전세계 금융시장을 휘청이게 만들었으며 골드만 삭스, 멜릴린치, JP모건, 리먼브라더스, 모건스탠리 등 전세계 금융시장을 손에 넣고 흔들어대던 거대 공룡 은행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화려했던 영광을 뒤로 한 채, 월스트리트의 온갖 비난과 조롱을 감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책 <천재들의 실패>는 LTCM을 운영했던 존 메리웨더 외 하버드, MIT, 연방준비위원회 출신들의 성공과 실패를 적나라하게 풀어헤친 책이다. <천재들의 실패>는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긴장감을 늦출 수 없도록 정리해놓은 탓에 정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게 된다. 마치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 경험해버린 기분이다. 워낙 재미있게 잘 적은 글이라 금융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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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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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는 수십년 전 몰락해버렸고, 현재 제대로 견제할 대체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상태로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가장한 자본주의만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았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날개를 달아 지구 전역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정부의 규제를 받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장을 위한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이며 몸에 에 딱 맞는 옷이다. 그렇게 규제 없이 효율성을 외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탐욕의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쓸고 다니자 계층간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 등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애초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이런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모두의 부가 전반적으로 동반 상승하고 보다 평등해진 세상에서 기술과 자본이 제공하는 갖은 혜택을 골고루 나눠받으며 즐겁게 사는 삶을 꿈꾸지 않았을까. 민주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가 그걸 가능케 해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본, 자유는 평등, 나눔, 복지 등과는 정반대의 뜻을 의미하게 되었다. 2010년대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선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차이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역사상 가장 빈부의 격차가 심했다던 1920년대 상황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 1920년대에 상위 1%가 가져가던 부가 전체 부의 20%를 넘었는데, 한때 지속적으로 감소하다 1970년대부터 다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해 2008년 즈음 다시 20%를 넘었다. 그렇게 빈부의 격차가 한 없이 커지자 1920년대엔 대공황이 왔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며, 우연일지 모르나 2008년엔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쳤다. 그 이전 역사를 보아도 불평등이 극에 달할때 폭동이 일어나거나 혁명이 일어났다.

 

미 노동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라이시는 그의 책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서 현재 미국, 유럽, 아시아 전체에 퍼져 있는 금융위기는 상대적 불평등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이런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만들어 갈 때만이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친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가장 시급한 일은 바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지게 된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장의 자율에만 맡겨 놓아서는 불평등 완화, 빈부 격차 감소는 이루기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자율시장 약화) 다른 한쪽이 부풀어오르기 마련이므로(정부영향력 강화) 이를 견제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 하에서 일반 시민들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시민들의 권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투표권일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거대한 개혁 없이도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그렇게 될 수 있다. 정부와 국민들이 힘을 합쳐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제도를 바꿔나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이데올로기는 결코 정답이 아니다. 지금처럼 끝없이 경쟁하고,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며 그 결과 불평등이 만연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사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를 들여다보면 결국 이런 큰 차별의 끝엔 전쟁이나 금융위기 같은 대혼란이 찾아왔다. 누가 이런 세상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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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의 함정 -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
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지음, 주익종 옮김 / 필맥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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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벌이가 대세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외벌이 가정보다 맞벌이 가정이 더 많다. 나 역시 맞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 맞벌이가 당연시되는 사회가 되었을까?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외벌이가 대부분이었고 맞벌이는 되려 특별한 경우로 취급받곤 했었는데 말이다. 이 책 <맞벌이의 함정>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맞벌이 가정이 처한(혹은 처할 수 있는) 여러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미국의 이야기다. 그러나 곧 한국의 상황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외벌이 가정이 다수였다. 남편은 경제를 책임지고 아내는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이 전형적인 가정의 생활패턴이었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맞벌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맞벌이를 하지 않고는 더이상 가계를 꾸려나가기 힘들게 되었다. 현 세대는 한 세대 전에 비해 교육수준도 높고 연봉도 많이 받는다. 더군다나 맞벌이로 인해 이중수입이 가능하니 전 세대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재정파탄으로 내몰리거나 저축을 거의 하지 못하고 빚이 늘어가는 삶에 허덕이는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흔히 말하듯 이 사회가 과소비, 사치풍조에 물들어 무절제하게 흥청망청 써댄 결과 재정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맞벌이의 함정>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가계재정이 힘들어진 주 원인은 중산층으로 계속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 충실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자녀교육문제, 가족안전문제가 있다.

 

  미국의 경우 공립초등학교 수준이 상당히 낮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질 낮고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가는 곳이 공립초등학교다. 심심찮게 총기난사 사고도 일어나곤 한다. 시내 치안도 불안하다. 마음놓고 거리를 활보하기 힘들다. 내 자녀만큼은 그런 불안한 환경속에서 교육시키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 많은 부모들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 사립초등학교를 선택한다. 내 가족만큼은 평화로운 공간에서 지내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안전한 주거공간을 찾도록 부추긴다. 그렇게 시선을 교외로 이동시킨다. 안전한 사립초등학교, 평화로운 전원주택이 있는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교외에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문제는 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급부족은 필연적으로 가격 상승을 초래한다. 부모들이 교외생활을 선호하게 되자 중산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교외의 한적하고 안전한 주택가격이 치솟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오르는 주택가격은 급기야 외벌이 가장의 경제력만으로 구입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게 되었다.(물론 여성 교육수준 향상, 사회인식 변화 등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한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학군을 따라, 생활하기 편한 역세권을 따라 늘어선 아파트 가격은 평범한 가정이 감당하기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마음껏 외식하거나 명품 의류를 사거나, 고급 승용차를 굴리지 않는다. 마음 편하게 국내(외) 여행을 떠나지도 않는다. 한 달동안 결재되어 있는 카드금액 내역을 훑어봐도 딱히 과소비 한 부분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모이지 않는다. 부부의 공동 경제활동으로 수입이 두배인데도 생활비는 늘 부족하다. 가장 큰 요인은 주택구입(유지) 비용과 자녀교육에 너무 많은 재정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주택, 자녀교육 두가지는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게 만드는 필수 요소다. 멋진 주변환경에 둘러쌓인 좋은 집에서, 넉넉히 투입된 교육비로 자녀가 부모보다 높은 수준의 삶을 살 가능성을 최대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중산층 부부들의 로망 아닐까. 그 로망이 지속되는한,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맞벌이 가정의 재정은 늘 위태할 수 밖에 없다. 적고 보니 나도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겠다.

 

  아, 그리고, 제목 <맞벌이의 함정>을, 되려 외벌이 가정이 안전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분들을 위해 한마디 하자면, 외벌이 가정은 아예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외벌이 가정은 굳이 '함정'에 빠질 필요도 없다. 함정에 다가갈 수 조차 없으니 말이다. 맞벌이 부부가 그나마 중산층의 경계에서 버둥거리기라도 하는거라면, 잔인하지만, 외벌이 가정은 그냥 하층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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