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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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독서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소설만 읽기에도 바쁘다고. 하지만 우리는 미국 소설은 물론이고, 영국 소설, 중국 소설, 일본 소설 그리고 심지어 아프리카 소설까지 읽는다며 즐거운 담론을 나눈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가 쓴 <열정>을 읽었다. 우리 독서가들의 스펙트럼이 이 정도라는 말을 하고 문득 하고 싶었다.

 

산도르 마라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출신으로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덕분에 루마니아 출신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타 뮐러 생각이 났다. 그리고 보니 노벨문학상 이후로 그녀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나. 전혀 소식이 없다. 또 샛길로 샜구나. 조국을 떠나 망명생활 끝에 1989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권총자살을 했다고 한다.

 

알라딘 이웃인 폴스타프님의 서재에서 보고서 지난 주말에 헌책방에서 사다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산도르 마라이 작가의 책을 세 권 샀다. 커피 한 잔 값도 안되는 가격으로. 작고하신 작가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누군가의 노고가 너무 작게 평가되어서. 어쨌든 금세 다 읽을 줄 알았는데 5일이나 걸렸다. 바로 다 읽기엔 서사의 전개가 조금은 지루했다고나 할까. 소설 <열정>은 1899년에 헤어져 자그마치 4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오랜 친구 콘라드의 출현과 그를 기다린 남자이자 장군 헨릭이 풀어내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헝가리의 고색창연한 성에서 아버지와 파리 출신 어머니도 세상을 뜨고, 사랑하는 아내 크리스티나 마저 없는 가운데 장군 헨릭은 90세의 유모 니니와 흘러가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 전 자신의 곁을 떠난 콘라드가 자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41년 전, 묵은 비밀을 풀기 위해 성대한 준비에 나선다. 헨릭이 추구하는 진실에 얽힌 비밀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본다면, 자그마치 41년이라는 세월이 지닌 무게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75세의 헨릭은 이미 한 번의 세계대전과 두 번째로 시작된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 헨릭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군대에서 경력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근위장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헨릭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었다. 부와 명예 모두가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24년 지기 콘라드는 갈리시아 출신으로 미래의 장교가 되기 위해 빈에서 소용되는 모든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가난한 부모님들은 끼니를 굶거나 극도의 절약을 감수해야 했다. 헨릭의 아버지는 이미 콘라드가 미래에 좋은 군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헨릭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1은 그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만, 1이 더 추가되면 당연히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까. 소설 후반에 전개되는 진실에 관한 작은 단서 하나를 여기에 심어 둔다.

 

개인적으로 내레이터를 맡은 소설의 주인공 헨릭의 이야기에 매료가 되었다. 수많은 사유와 가능성에 대한 타진을 거듭한 결과 헨릭이 도달한 결론은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헨릭의 이야기가 조금은 진부해지고 장황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전통적 문학 시대에 산도르 마라이 작가가 쓴 글이 모든 휙휙 지나가고 변신을 거듭하는 모바일 시대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독서가 개인이 작가의 시대에 투영해 들어가봐야 하는데, 아쉽게도 지난 세기 귀족들의 세계와 빈의 상황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으니 부족한 잣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자가 주목한 모든 관계에 대한 수십년 간의 사유를 거친 통찰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명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서, 부유한 친구의 어떠한 금전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런 관계야말로 상대방에게 종속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청년의 냉철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컬렉션’이라는 걸 알면서도 흔쾌하게 놓아줄 컬렉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을 다 깨닫게 되었을 적에는 이미 그 무수한 시간들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닐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우리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 <열정>의 독일어 원제는 <Die Glut>라고 한다. 우리의 친절한 네이버 사전의 도움으로 찾아보니 열정은 비유적인 뜻이고, 작열-열화 혹은 잉걸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내 삶에 열정은 어디쯤에나 있는지 혹은 존재나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소설 <성깔 있는 개>를 바로 읽기 시작했다. 좀 재밌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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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회원 댓글 폭격사건은 해결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댓글 달기가 무서워요..ㅎㅎ. 그새 중고서점에서 쓸어오셨군요. 대단한 ‘열정‘입니다. 자신의 열정 유무에 대해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니까요.^^.

레삭매냐 2017-12-05 14:05   좋아요 1 | URL
그게 비회원들의 댓글 폭격이었군요...

책에 대한 열정! 읽기보다는 컬렉션에 집중
하는 듯하지만 말이죠!!! 쿵야

sprenown 2017-12-0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렇다고 자폭까지..

2017-12-07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