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의 책 중에서 미디어 2.0에서 그동안 출간된 책들은 구할 수가 없다. 모두 절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과 <이런 사랑>은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는데, 작가의 초기 소설집인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에서도 독자들이 애정하는 책이 아니었는지 상태가 너무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 다른 책들은 얼마나 읽어댔는지 책장이 다 너덜거릴 정도였는데 말이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1975년 이언 매큐언 선생이 발표한 초기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한 작가의 전작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글솜씨이지만, 왜 작가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단편들을 지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00쪽 :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가 쓴 8편의 단편에는 결핍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입체기하학>에서는 주인공 남편이 이미 아내의 제멋대로 행동에 신물이 난 상태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자신만의 연구에 몰입해 있는 화자에게서 위기에 처한 결혼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핍이 엿보였다. 증조부가 남긴 타인의 24인치에 달하는 페니스 표본을 애지중지하는 장면을 도저히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 듯 싶다. 결국 증조부가 남긴 탁월한 일기에서 발견한 입체기하학 기술로 아내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남자. 이 단편은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단편영화 <사랑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던가. 공포와 괴기를 오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가정 처방>에서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비행청소년의 성적 판타지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렇게 당대 비행청소년 세계를 명확하게 짚어냈는지 그저 놀랄 지경이다. 비둘기들에게 유리 조각을 먹이로 던져 주고, 산 채로 잉꼬를 산 채로 구웠다고? 1실링을 주고 그 바닥에서 소문난 룰루 랄라 양의 비밀스러운 곳을 보겠다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타겟을 바꿔 근친상간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던 소년은 비행으로 세상에 맞선다.

 

모든 상황이 비극으로 종결되는 <여름의 마지막 날>은 또 어떤가. 부모님을 잃고 나서, 형의 제안으로 하숙을 치는 것으로 연명하던 화자의 삶에 등장한 고래 같은 여인 제니. 주인공의 누나 케이트 대신 제니를 무척이나 따른 아기 앨리스와 더불어 구성된 결핍 삼총사는 비극으로의 질주를 조용히 시작한다. 열두 살배기 소년과 같이 기우뚱거리는 보트를 타는 장면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 같은 로맨스 코드를 기대해 보게도 하지만, 지금까지 작가가 구사한 전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정말 짧은 단편 <극장의 코커 씨>에서는 성행위에 가까운 전위연극 준비를 하는 중에 정말 불상사가 벌어지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 혹은 계기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무려 코커(cocker)라니. "You Are So Beautiful"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조 코커(Joe Cocker)가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 짧은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글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나비>에서는 천연덕스러운 소녀 살해범의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소녀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부터 의심은 시작된다. 누가 봐도 피의자 스타일의 인상을 가진 주인공이 부인할수록 독자의 심증은 굳어져 간다. 진짜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화자가 진범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죄책감이나 양심이 결핍된 진범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죽인” 소녀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일련의 과정을 무덤덤하게 수행하는 싸이코패스 킬러의 초상을 이언 매큐언 선생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각인한다.

장어를 잡아 떼돈을 벌기 위해 어살을 만들던 남자는 애인 시셀과 함께 거주하던 방에서 소음을 만들어내던 주체가 엄청나게 큰 시궁쥐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들의 주변은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암울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 나가기 시작한 시셀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어떤 미래에 대한 꿈 결핍증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를 잃고 연극배우 출신 이모 미나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 소년 헨리의 이야기도 결핍으로 충만되어 있다. 우선 부모의 결핍, 영원히 무대에서의 삶을 지속하고 싶은 나머지 조카마저 배우로 만들어 자신이 상연하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어하는 미나. 조카 헨리가 싫어하는 여장을 강요하는 장면에서는 합리적 이성의 결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엿볼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바로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벽장 속 남자”의 엄마는 인생의 단계를 밟아 성인으로 성장해야 할 아들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가 성견으로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성장억제 호르몬 주사를 처방한 것처럼, 언제나 자신의 품 안의 자식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그 결과, 언어발달도 늦은 십대 소년이 된 벽장 속 남자는 엄마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정신지체아라는 모욕을 받으며 집에서 쫓겨난다. 이 또한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하지만 여드름쟁이 셰프에게 구박을 받다가 펄펄 끓는 기름을 악당의 사타구니에 퍼붓는 기백을 발휘하기도 한다. 삶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소년은 절도와 수감, 보호감찰을 차례로 경험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벽장 안이 가장 편안하고, 엄마의 보호를 받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방문한 사회복지사에게 고백하는 캥거루족을 뛰어넘은 자라족 남자의 이야기는 서글프다. 벽장 속 남자는 그야말로 사회적 결핍이 만들어낸 결정체일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단편으로 담아낸 노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게 된 모양이다. 냉전시대 적에게 이미 노출된 지도 모르고 열심히 비밀공작을 수행한 스파이물에서, 엄마의 자궁 속에서 살부 음모를 알게 된 태아의 이야기로, 신혼 첫날 파경에 이르게 된 남녀의 혼돈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의도적 자살에 이르게 된 소년 이야기로, 평온한 주말 하루가 악몽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대한 추적으로, 과거 애인의 죽음에 관련된 폭로로 관계가 틀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이모저모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이언 매큐언 작가의 전작읽기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에 아주 적절한 초기작 읽기였다고 자부한다. 이제 <이런 사랑>, <시멘트 가든> 그리고 <속죄>가 남았다.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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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0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이언 매큐언 책은 거의 그랬던 것 같아요. 절판된 책이 많다니 왠지 욕심이 나는군요. 하하.

레삭매냐 2017-07-20 10:51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에 이언 매큐언 책 읽으면서
모든 책을 다 구했는데, 이 책만 못했네요...

중고서점을 통해 구하려고 대기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