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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선정했다는 팔팔하고 전도유망하다는 젊은 미국 작가들의 책을 컬렉션한 적이 있다. 기존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국내에 소개되기도 어렵고 또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아 곧 절판되곤 했다. 절판됐어도 절판본 사냥이라는 재미를 선사해 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지난 주말 한겨레 사설에 등장한 켈리 리처드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읽었다. 그 영화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영화의 한 커트. 그것은 바로 베스 트래비스와 제이미가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었다. 어라, 이 장면 내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랜타가 선정한 앞으로 기대되는 미국 작가 중의 한 명이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2009)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트래비스 B>를 각색해서 모두 세 개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영화 <어떤 여자들>은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두 편의 이야기는 마일리 멜로이의 첫 번째 소설집인 <Half in Love: Stories>(2002)에서 소환되었다.
지난 3월 13일날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말았다가 이번에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하바드 대학 출신 마일리 멜로이는 미국 몬태나 주 출신으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다수의 이야기들의 공간적 배경은 몬태나 깡촌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로스 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미국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담은 단면을 짚어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 대출 때문에 자그마치 9시간 운전을 해서 글렌다이브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학교법을 가르치러 오는 풋내기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카우보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떠난 캠핑에서 성추행을 당한 소녀의 이야기, 어쩌면 자신이 애인이 될 뻔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걸고 래플 게임에 나서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단편소설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바로 연상됐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이 그리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마일리 멜로이가 구사하는 이야기들은 확실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의사형과 건들거리며 스키 강사로 사는 에런과 조지 형제가 등장하는 <스파이 대 스파이> 역시 흥미롭다. 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상대방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족의 실체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라라는 상상을 구체화했다고나 할까. 결국 금지된 코스에 도전했다가 심각한 부상 혹은 죽을 뻔한 사고현장에서 치고 박는 장면으로 형제는 나름대로 방식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단편도 눈덮인 스키 리조트를 배경으로 해서 영화화한다면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관한 옴니버스 구성이라면 아마 안성맞춤일 것이다.
<투스텝>에서는 도무지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지청구하는 여자친구가 모르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렇다, 바로 화자가 욕하는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혹은 레지던트 중의 한 명이 바로 청자인 것이다. 과연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그녀를 소환해서 이런 희비극 무대를 마련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화자는 정말 뛰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정말 잘 조절할 수 있는. 독자는 화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청자의 모놀로그를 통해 파악해낸다. 청자 역시 유부녀란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유지하려는 여자친구와 자신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속에서 과연 청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외에도 끔찍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살인범의 고스족 여자친구를 상대하는 중년의 아버지 이야기도 등장한다. 비밀을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쩌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 현재의 행복해 보이는 현상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휘청거린다. 자신이 어마어마한 상속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준 <릴리애너> 할머니의 등장에 적어도 속으로는 환호작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도 즐겁다. 수많은 남편들을 갈아 치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한 할머니가 자신에게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고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에 분노하지 않을 예비상속자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죽었다던 할머니가 멀쩡하게 등장해서 증손녀들에게 강아지 알레르기를 선사하고, 아버지의 실업과 긴축재정 때문에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조차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가장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펌프질한다. 릴리애너 할머니는 등장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좌초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소설의 초반에 혹시 유령이 등장했나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수영 코치와 바람이 난 아버지의 갈등을 그린 <아이들>, 딸들의 등쌀에 아내와 사별한 후 자신이 진짜 사랑한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세월을 보낸 아르헨티나 지주 <아구스틴>이 코끼리 잡는 총으로 하마터면 문제의 근원 중의 하나인 둘째딸을 쏠 뻔한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통쾌하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에 마음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미국식 명절 크리스마스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히치하이킹을 받아 들였다가 곤욕을 당하게 되는 가족이 등장하는 <오 타넨바움>도 흥미진진하다. 희대의 강도들처럼 어느 순간 돌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상상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딸에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는 선의가 결국 외도로 결말이 나는 장면에서는 후안무치한 남자 에버렛의 뺨을 갈겨 주고 싶었다. 뭐 삶이 다 그렇게 가는 거겠지.
전반기에 읽은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함께 마일리 멜로이 작가의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을 감히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들로 손꼽고 싶다. 좋은 책이라면 동시대인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작품 모두 자극적인 MSG를 사용하는 대신, 단백한 소재들을 재료 삼아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한 그런 멋진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선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왜 마일리 멜로이의 다른 작품들이 아직도 미출간의 늪에 빠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 출간된지 한달도 안되는 마일리 멜로이의 신간 <Do Not Become Alarmed?>는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굴 책 중의 한 권이라고 한다. 원서라도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