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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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산 제임스 설터의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옆지기에게 보라고 권해 주기도 했었는데 나는 이제야 읽었다. 지난주에 다녀온 서천, 변산 그리고 군산을 도는 여정 도중에 이제는 작고하신 분의 책을 읽는 기분은 묘했다. 그 때 <스포츠와 여가>도 함께 데려 갔었는데 그 책은 어제 새벽부터 읽기 시작했다. 역시 설터 작가의 책도 전작 섭렵의 길에 들어섰는가.

 

4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설터의 대표작 <가벼운 나날>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블라디미르(비리) 벌랜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네드라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다. 유대계 미국 작가인 설터만큼 삶의 미세한 균열이 붕괴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변하는 계절, 항상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기들과의 사교모임 그리고 사소한 대화들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댄다.

 

성공한 건축가인 벌랜드 부부는 뉴욕 허드슨 강 계곡 부근의 우아한 빅토리아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고객들과 지인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은 일상이다. 네드라는 맨해튼으로 차를 몰고 가서 고급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에서 쇼핑을 즐기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 비리와 네드라에게는 프랑카와 대니라는 어여쁜 딸들도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삶이야말로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이 아닐까. 게다가 비리와 네드라에게는 각자의 애인도 있다. 이게 뭐지? 이야기의 시작은 아마 1958년이었던 것 같은데 거의 이십여 년에 달하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작가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예리한 시선으로 글로 옮긴다.

 

가족에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인 비리,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파티를 위해 직접 고급스러운 식재료들을 장보고 준비하는 아내 네드라 그들의 일상은 정말 완벽해 보인다. 그들 부부에게 서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지향점은 서로 달라 보인다.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굴러가는 부부였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미국 상류계층의 문명화된 부부는 결혼생활 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톨스토이 소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가족은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긴 마련이 아니었던가.

 

비리와 네드라 역시 서로 다른 이성이 함께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모두 겪는다. 아이들의 성장, 생일파티, 크리스마스 선물교환과 부모의 죽음 같은 일상사가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리고 설터의 다른 소설들처럼 그들이 아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해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아낌없이 나누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그들은 네드라가 준비한 음식을 들며 뉴욕 연극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와 가십들을 공유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자신들의 결혼생활도 언젠가 호사가들의 요릿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더 놀라운 일 중의 하나는 오쟁이진 남편인 비리가 아내 네드라의 애정행각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해 가는 배짱이 대단하다. 또 한편으로 자신의 애인이자 비서였던 카야를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뉴욕의 사교계도 비좁은 모양이었던지 곳곳에서 카야의 흔적을 찾는 비리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사랑의 감정인지 그도 아니면 젊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인지 모를 그런 감정들이 부유한다. 책이 출간된 다음, 설터도 비리와 네드라처럼 이혼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결혼의 위기를 경험해서인지 벌랜드 부부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부산한 삶의 와중에 그들은 삶이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네드라는 비리에게 어느날 이혼을 선언한다. 언제나처럼 아내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따랐던 남자는 고분고분하게 이혼에 동의한다. 네드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선다. 뭐 삶이란 그런 거지. 네드라가 떠나고 나서야 비리는 그녀가 없는 자신의 삶은 실패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어쩌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한 비리 역시 유럽행 여객선에 오른다. 네드라와 딸 프랑카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리고 로마에서 또다른 연인 리아를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출발에 나선다. 네드라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가벼운 나날>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집단주술처럼 되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행복은 행복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댓가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행복할 수는 없던 모양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니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했는데, 하나씩 내려놓다 보니 정작 그것들이 행복을 이루는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아니 믿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작가는 대답한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노라고.

 

군데군데 책에 보이는 제임스 설터 작가가 창조한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권태로운 일상에 묶여 있는 이들 옆으로 진실이 헤엄쳐 지나”간다(320쪽), “어떤 사건에는 전조가 있고, 파멸에도 시작이 있다”(315쪽)거나, “대화가 보이기만 하고 들리지는 않았다”(196쪽), “서로에게 줄 것이 없옸고, 이 순수하고 불가사의한 사랑으로 묶”여(188쪽) 있다는 표현들은 정말 원서로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쉴 새 없이 다른 책들을 읽어 대는 바람에 지금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년쯤 다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터 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시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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