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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은 쥐 한 마리로부터 시작됐다. 소설 속 주인공은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상사의 집에서 쥐 한 마리를 용감하게 잡았다가 역병이 창궐하는 C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다가 기이한 삶의 궤적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편혜영 작가의 <재와 빨강>의 주된 내용이다. 다음 주로 예정된 독서모임에 최근작 <홀>을 다 읽고 나서, 서가를 살펴 보다 보니 예전에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재와 빨강>이 눈에 띄어서 광복절 연휴 기간 동안 읽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작년 초여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메르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방에서 건너온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한 사회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아무런 조치도, 고지도 않은 채 그저 역병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던 정부의 무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우리는 역병의 시대를 헤쳐 나온 용사들인 셈이다. 그 역병이 발생하기 전, 5년 전에 이런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혜안을 높이 사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소재와 우연으로 보아야 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파탄난 가정의 생존자로 등장한다. 방역회사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파경으로 끝난 결혼생활에서 C국으로 망명에 성공하지만, 온갖 쓰레깃더미와 역병 그리고 역병을 옮기는 주범으로 지목된 쥐들이 창궐하는 망명지 역시 그에게 안식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국에서 가져온 트렁크를 숙소에서 털리고 감염자로 지목되어 격리조치까지 당하는 처지에 몰린다. 새출발을 위해 파견근무에 지원했지만, 일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열흘 간의 휴가를 받게 된 주인공의 암울한 미래의 고난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처의 살해범으로 C국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주인공은 숙소 밖에 쌓여진 쓰레깃더미로 투신을 감행한다. 뭐 이 정도라면 스릴러 영화로 만들기에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은가.
문득 자신이 기르던 개를 방치해 두고 왔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친하지도 않은 유진-전처와 재혼한 동창이다-에게 전화를 해서 개를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다. 유진이 전하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처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와 함께 죽은 채 발견한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범행이 자신의 출국 즈음에 벌어졌다고 하니,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노숙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날카로운 칼날의 실감만이 그의 잠재된 죄의식을 자극할 따름이다. 과연 주인공이 진범이라는 말일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파견근무 사원에서 졸지에 타국의 노숙자로 변신한 주인공은 쓰레깃더미가 지천으로 널린 공원에서 기이한 새출발을 시작한다. 편혜영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비참함의 밑바닥을 그대로 제시한다.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모국에 대한 기억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의 노숙자 생활이라는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저격한다. 그것은 그가 가진 유일한 쓸모 있는 기술인 사냥의 대상인 쥐의 그것과 다를 게 없노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 치명적인 역병에 감연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노숙자를 바디백에 넣어 소각장으로 보내 처리한 그와 동료들의 무감각한 양심에 대한 인과응보는 자신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모양이다. 구사일생으로 바디백에서 탈출한 주인공은 자신의 전공(?)인 쥐 사냥꾼으로 거듭나게 된다.
편혜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재와 빨강>에서도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기대할 수는 없는 듯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작가는 아마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배송 레이블이 붙은 관작처럼 포장이 되어 모국으로 밀항하는 방법에 잠시 귀가 솔깃하지만 돌아가봐야 자신을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을 떠올리고는 잔류를 선택한다. 작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놀라운 항상성에 주목한다. 어쩌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역병조차도 일상의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역병에 대처하는 파편화된 우리 공동체의 민낯을 우리는 불과 1년 전에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안위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모습에서 공동의 위협에 우리 공동체와 국가가 얼마나 허약한지 정확한 시선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다시 주인공 개인의 고독을 분석해 본다면, 전처의 죽음 앞에서 그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진범일지도 모른다는 엄혹한 현실보다 다시는 전처와 함께 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고독을 다스릴 수 없다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자기인식이었다.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료 노숙자를 바디백에 담아 소각장에 내던질 수 있을 기백의 부메랑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주인공의 그런 모습은 얼마 전 본 영화 <부산행>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다른 탑승객들을 좀비떼의 먹이로 던져주며 도생을 추구하는 중년남자의 저열한 생존욕망을 연상시켰다.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우리네 모습과 다를 것도 없다는 점에서 정말 씁쓸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제목에 들어가 있는 재는 모든 것이 소멸된 후 흩날리는 소각장의 재를 의미하고, 빨강은 주인공이 연루된 두 번의 죽음이 의미하는 피를 지칭하는 게 의미하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