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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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작가는 역시 고수였다. 내가 만난 그의 작품인 <허삼관매혈기>와 <제7일>에서도 현대 중국에 대한 유머로 버무린 훌륭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었다면, 이번에 읽은 산문집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에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중국에 대한 여러 상념이 담긴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어느새 G2의 반열에 올라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기치 아래 전념하고 있는 중화국가의 일면을 문학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독서의 의미를 찾고 싶다.

 

산문집에서 위화 작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전 세계에 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알린 계기가 됐던 베이징 올림픽 즈음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에피소드부터 시작해서 작가가 심리묘사를 배운 스승으로 모신다는 미국의 저명한 작가 윌리엄 포크너에 얽힌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일가를 이룬 작가의 단상들이 이어진다. 사실 우리도 이미 고도압축이라는 방식으로 집약된 산업화의 과정을 거쳤지만, 서구 사회에서 수백년 간 진행된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중국식 민주주의의 이행이라는 쌍두마차는 누가 봐도 다루기 힘든 과정이었다.

 

대부분의 자본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필연적인 불평등은 이미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작가는 이 산문집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오래된 흑묘백묘론은 물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의 중국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주술사의 부적에 다름 아니다. 위화 작가의 글을 통해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 사는 중국 소년들의 꿈과 오지 시베이 지방에 사는 소년들의 그것은 도저히 접점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화 작가의 이야기는 이웃나라에 널리 퍼진 흙수저론의 그것과 너무 유사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하는 리얼리티쇼의 핍진성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다른 글에서 위화 작가는 애국심에 불타는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심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로버르트 판데르힐스트의 카메라 렌즈는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의 모습이 아니라 값싼 차와 변변찮은 음식을 대접하는 민중에 포커스를 맞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열정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민족 전통이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노라고 쓰고 있다.

 

위화 산문집의 한 축이 이렇게 오늘날 중국의 이모저모에 대한 스케치라면 또다른 한 축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문학론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영국 출신의 이언 매큐언은 모든 문학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원천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글을 빚어내는 요술쟁이 같은 문학가라는 것이다. 하긴 유사 이래 어디 새로운 것이 있었던가. 사실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의 작품을 발굴해서 하나씩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위화 작가의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또하나의 도전의 무대를 제공해 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상과 변신>이라는 주제에서도 서양과 동양의 그것을 비교분석하는 기교를 보여 주기도 하고, 합리적이면서도 힘있는 서사를 주문하는 대가의 풍모에 감탄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혁이 빠진 중국현대사 100년에 대한 맹렬한 지적도 위화 급의 작가나 가능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지우고 싶은 과거라도 보듬고 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절대 동의하는 바다. 그렇게 중국 역사를 수십년이나 후퇴시켰다는 문혁이 마침내 끝나고, 서구 작가들의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침식도 잃은 채 뒤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탐닉했노라는 작가의 회상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왔다. <죄와 벌>을 읽고 급격하게 상승한 작가의 심박수가 훗날 츠바이크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서 조절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정말 흥미진진했다. 위화 작가 정도 되는 고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문학편력기는 정말 재밌다.

 

한편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모든 작품을 읽다시피한 하진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도 인상적이었다. 인민해방군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는 문학노동자 하진. 그가 최근에 발표한 <난징진혼곡>을 읽었다는 전언에 부랴부랴 그의 작품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출간되었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 보았지만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하진 작가의 위상이 바로 떠올랐다. 모국에서도 쉽게 다루지 못하는 주제를 대범하게 다루는 이방인 작가의 노고는 아무리 치하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차세대 젊은 중국 작가들이 국내에 있으면서도 국내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써내는 데 대한 선배 작가로서의 질책도 묘하게 섞여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어지는 작가로서의 세계주유기는 중국과 문학세계를 거쳐 긴 항해에 나선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짓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당부한 것과는 반대로, 맛보는 방식이 아니라 마시는 방식으로 책을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긴 호흡이 필요한 장편보다 짧은 호흡의 산문집이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되돌아보면 촌철살인의 문구를 되새김질하는 느린 묵상의 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샤킬 오닐이 주는 즐거움과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제시하는 고수와의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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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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