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 들메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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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나의 간단한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코피우스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썼을까라고 말이다. 팔레스타인 카이사레아 출신의 사마리아인으로(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비잔티움 제국 수사학자이자 공식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는 야사에 해당하는 이 책 말고도,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장군으로 로마제국의 고토(故土)를 수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벨리사리우스의 리비아원정, 이탈리아원정 그리고 페르시아원정을 모두 수행하면서 <전쟁사>라는 기록을 남겼고, 또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노골적으로 칭송한 <건축론>을 저술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해 원로원 의원이 되어 자줏빛 토가를 걸치는 영예를 얻기도 했던 관변학자가 어찌해서 이런 불경스러운 기록을 남겼는지가 이 책을 읽는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역사가로서 프로코피우스는 어쩌면 기존의 기록인 <전쟁사>와 <건축론>에서 자신이 기술했던 내용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들을 세 명의 인물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벨리사리우스, 유스티아누스 황제 그리고 테오도라 황후가 그들이다. 일체의 부정적인 편견을 버리고 그의 기록을 더듬다 보면, 희대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벨리사리우스는 오쟁이 진 남편으로 아내 안토니나에게 휘둘려 전쟁도 망친 못난 장군이라는 것이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의 명군으로 알려진 유스티아누스가 뛰어난 무공을 세운 벨리사리우스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동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 오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와 평화협정을 맺어 한쪽 전선을 안정시키고, 서방에 전력을 집중시킨 전략은 비잔티움 제국 최대 판도를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던가.

 

프로코피우스는 비사의 후반에서 사실상 제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유스티아누스와 테오도라가 그렇게 동부전선에서 전역한 병사들에게 지급한 급여조차 주지 않았다고 악의 가득한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퇴임한 후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제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나 사료된다.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이 모시던 황제를 사실상 악마와 다를 바 없다고 저간의 떠도는 소문에 근거해서 묘사한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비잔티움 제국에 미신적 요소가 많았다고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황제와 황후가 제국의 신민들은 물론이고, 제국의 방위를 맡은 병사들 그리고 관료들에까지 착취를 일삼았다는 주장과 함께 지진, 기근 같은 자연재해까지 모두 황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과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비정상적인 축재 형태에 대해서도 프코피우스는 매서운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프로코피우스가 어쩌면 고대 로마공화정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대 같은 민주공화정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수장인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독재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황제의 폭정 때문에 수천만 명이나 되는 제국의 신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과장한 부분도 당대의 인구를 고려 해봐도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치다. 그런 부분이 많을수록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과연 저자는 몰랐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확실히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이래 능력 이상으로 확대한 제국의 영역을 지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화정 로마 시대 말기의 카이사르처럼 갈리아를 정복해서 게르만 족의 항시적인 침입으로부터 완충지대를 만들고 로마식 시스템을 정착시켜 항구적 평화를 도모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없이 이루어진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벨리사리우스라는 명장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이탈라이 본토 그리고 에스파냐 일부분까지 일시적으로 수복할 수는 있었어도 그 영토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건 당대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상태나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대규모 원정과 제국의 통치를 위해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프로코피우스가 비난한 것처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정책들을 남발했던 게 아닐까. 게다가 사실상 제국의 공동통치자였던 테오도라 황후에 대해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을 엮어 헤타라이(고급 매춘부) 출신으로 매도하면서(정사에 의하면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황후가 황제를 뛰어넘는 사실상의 실권자였노라고 폭로하고 있다.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여성에 대한 거부감을 일부 엿볼 수도 있다.

 

확실히 이 시대에 계속된 원정으로 재원이 부족했다는 사실도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헬레스폰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대한 관세 부과도 결국 재정부족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매점매석에 의한 인플레이션 현상도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참제도에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던 낙타도 없애 버려서 전선에 보급할 물자 수송이 어려웠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어쨌든 제국 통치의 최종 책임은 최고권력자에게 있는 것이니 프로코피우스의 비난도 아주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일전에 읽은 레이 황 교수의 주장을 유스티아누스에게도 적용시켜 본다면, 최고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에게 제국의 모든 신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을 적용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한된 제국의 재화와 자원을 선별적으로 배분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한 원정을 기획하는 결정만으로도 중세 황제에 대한 기대치는 충족된 게 아닐까.

 

도를 지나친 최고권력자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어두운 면을 다뤘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역사적 가치를인정받을 만하는 생각이다. 역사가가 남긴 기록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아마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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