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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브라이드
윌리엄 골드먼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한동안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줄창 방송을 해주어서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의 주요 장면들을 보곤 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윌리엄 골드먼이라는 할리우드의 탁월한 스크린플레이 작가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사실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후반에서 이니고 몬토야가 루겐 백작에게 칼을 마구 휘둘러 대며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소개하는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도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 캐릭터도 버터컵 공주나 해적왕 웨슬리가 아닌 이니고였다.
소설은 1973년에 나왔고 영화는 1987년에 만들어졌으니까 14년의 시차를 두고 소설과 영화가 세상에 나왔나 보다. 열 살 배기 소년인 나는 폐렴으로 고생하던 중, 아버지가 읽어주신 모겐스턴의 <프린세스 브라이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영화에서는 <케빈은 열두살>의 프레드 새비지가 꼬맹이 역을 맡았다.
멀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가깝지도 않던 시절, 플로린 왕국에 내로라하는 미모의 소녀 버터컵이 살았단다. 왜 하필이면 로맨스 영화나 소설에는 절세미녀가 등장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 걸까. 외모지상주의는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양이다. 시골 출신의 이 소녀 곁에는 농장 머슴애란 친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웨슬리. 초반에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움 외모가 치솟는 버터컵 이야기가 나오더니, 그 다음에는 백작 부인의 행차로 웨슬리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버터컵의 극적인 변신 이야기가 이어진다. 버터컵은 그 순간 웨슬리를 자신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지만, 웨슬리는 그녀의 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덧없는 청춘들의 사랑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게 되는 걸까.
한편, 버터컵과 웨슬리가 살던 플로린 왕국에는 험퍼딩크라는 사냥에 미친 왕자가 한 명 살고 있었는데 때가 되어 왕위계승을 하기에 이르렀고, 내친 김에 결혼도 하기로 결심한다. 이웃나라 길더 왕국 공주가 대머리였다는 사실에 식겁한 험퍼딩크 왕자는 그저 외모 하나로 색싯감을 고르기로 결정한다. 어째 하나 같이 그렇게 외모타령을 하는 걸까. 그렇게 해서 결정된 처녀가 바로 버터컵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신분상의 문제로 평민이었던 버터컵을 바로 왕자의 신붓감으로 들일 순 없고 해머스미스의 공주로 신분세탁과 동시에 귀족의 예절을 가르쳐 당당하게 결혼을 치를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좋겠으련만 바로 시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려서부터 말타기에 일가견이 있던 프린세스 브라이드 버터컵은 결혼을 앞두고 말타고 바람 쐬러 나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삼인조 괴한(이니고 몬토야, 페직 그리고 비지니)에게 납치되어 상어 밥이 될 뻔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이 때 납치된 버터컵의 뒤를 쫓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으니, 볼 것도 없이 이미 무시무시한 해적왕 로버츠에게 잡혀 죽을 것으로 알려진 웨슬리가 불사조처럼 살아난 것이다. 그냥 농장 머슴애에 지나지 않던 웨슬리는 언제 그렇게 뛰어난 검술을 익혀 스스로 마법사 이후 최고의 검객이라 자부하는 이니고 몬토야를 제압하고, 천하장사 페직마저 기교로 패퇴시키고, 음모와 술수에 달인 비지니마저 독약으로 처리하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버터컵을 구해내 해피엔딩에 도달하는가 싶었지만, 천하제일의 사냥꾼 험퍼딩크 왕자의 추격에 잡혀 비명횡사할 운명에 처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이니고 몬토야가 어떻게 해서 험퍼딩크 왕자의 심복 루겐 백작과 원수지간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도밍고의 복수를 위해 검객이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들려준다. 사실 어쩌면 끝이 빤해 보이는 메인 스토리보다 중간중간에 들이치는 그런 소소한 서브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페직 또한 어릴 때 또래들에게 당한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소녀 심성을 가진 사나이로 등장한다. 자신을 보살펴 주는 전략가 시칠리아인 비지니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지만 막상 비지니가 없어지고 나자, 자신의 운율친구 이니고와 힘을 합쳐 험퍼딩크 왕자와 루겐 백작의 사악한 수중에 들어간 웨슬리를 구해내는 작전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소설 도중에 읽은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란 부분이야말로 윌리엄 골드먼이 <프린세스 브라이드>를 쓰게 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됐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닌 책의 제목이 상징하는 버터컵에 적용시켜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버터컵은 어려서부터 지적 훈련을 통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된 인물이 아니다. 농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떤 점도 닮지 않고 제 스스로 그저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험퍼딩크 왕자에게 발탁되어 장차 플로린 왕국의 왕비 그러니까 다시 말해 두 번째 가는 권력자의 지위에 오를 예정이다. 물론,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잔혹하기는 하지만. 혼례식까지 왕자의 흉악한 음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의 측근과 독자뿐일 테니까. 타고난 아름다움 하나로 부와 권력 그리고 온 백성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는 게 공평한 일일까. 참고로 영화에서는 요즘 잘나가는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던 로빈 라이트가 풋풋한 시절의 버터컵을 연기했다.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아름다운 여주인공과 그녀를 사랑해 마지않는 웨슬리, 그들에 필적하는 악당 험퍼딩크 왕자, 루겐 백작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선악의 대결구조를 펼친다. 주인공이 의도하는 목적(이 소설에서는 아마도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온갖 환난고초와 죽음까지 극복해내는 눈부신 서사구조는 확실히 재밌다. 웨슬리는 결국 검의 달인이자 고문기술자 루겐 백작이 고안해낸 기계에 목숨을 잃게 되지만, 중세스러운 시대에 어울리는 미러클 맥스와 그의 마녀부인 발레리가 엉터리로 만들어낸 부활알약을 먹고 살아나, 험퍼딩크의 왕자의 마수에서 버터컵-공주를 구해내 잘먹고 잘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참으로 디즈니스러운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말미에 따라오는 에필로그는 사족처럼 보인다.
초반에 몰입이 좀 어려웠지만, 웨슬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버터컵이 낙심해서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장면서부터 시작하는 중반부터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크린플레이 작가라서 그런지 영화적 상상을 담아 페이지를 휙휙 넘기게 하는 그런 마법 같은 기술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표지에 보면 우측에 버터컵과 키스를 하는 웨슬리 너머로 플로린 왕국의 성을 볼 수가 있고, 좌측에서 백마를 타고 두 사람 사랑의 방해꾼인 험퍼딩크 왕자가 칼을 휘두르는 일러스트는 윌리엄 골드먼이 <프린세스 브라이드>에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담은 컷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일러스트 한 번 기차게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