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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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문득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모든 귀결점이 바로 죽음으로 향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아스라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가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형철 선생의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일본 순문학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그렇게 죽음 혹은 상실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나의 편견일 수밖에 없지만 그동안 일본 문학에 대한 나의 평가는 야박했다. 서구,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대면서도 이웃 나라 일본 문학에 대해서는 왠지 서구의 그것에 비해 한 수 아래로 생각해온 게 사실이다. 지금은 소원해진 지인도 언젠가 나에게 일본 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예로 들면서 그런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신형철 선생이 손에 꼽은 하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순문학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미야모토 테루 작가를 만나게 됐다. 소개된 세 명의 작가 중에 이 책이 절판되었다는 이유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 앞서 이 책을 읽게 해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죽일 놈의 절판본에 대한 사랑이란.

 

신형철 선생이 직접 낭독해준 <밤 벚꽃>에 아무래도 먼저 손이 갔다. 예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읽는 낭독이 주류 독서방식이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홀로 읽는 묵독이 대세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낭독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독서라는 것이 개인적인 체험이다 보니 낭독보다는 묵독이 더 낫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단편 <밤 벚꽃>의 주인공은 고베에 사는 49세의 이혼녀 아야코다. 소설은 그녀의 단아한 목소리로 전개된다. 20년 전에 이미 이혼했고, 외아들이었던 슈이치를 1년 전에 사고로 잃었다.

 

그렇게 폐경기에 접어 든 혼란스러운 그녀에게 두 명의 남자가 찾아온다. 한 명은 전 남편인 야마오카 유조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들을 잃고 하숙을 친다는 말에 하룻밤 신세지겠다며 정중하게 요청하는 신원불명의 한 청년이다. 이 둘 때문에 아야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여전히 서먹하지만, 죽은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유조를 대하며 아야코는 그동안 자신이 미처 몰랐던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남편의 외도로 가차 없이 이별을 선언했지만, 그 때 한 번만 눈감아 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그녀를 엄습한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전기기술자를 자처하며 그녀를 찾아온 다른 한 청년은 일박을 정중하게 요청하는데, 알고 보니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로 아야코가 거주하는 저택에서 신혼의 첫날밤을 보내고 싶은 속셈이다. 그들을 유혹한 밤 벚꽃을 바라보며, 아야코는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회상한다. 존재의 부재를 대면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고나 할까.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판단과 결정을 요구하는데, 그 결과는 온전하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뒤에 바로 따라 읽은 <박쥐>는 맨숭맨숭한 느낌이었다. 나(곤스케)는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시절 친구로부터 친구 란도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마침 여자친구 요코와의 만남에 늦은지라 경황없이 그녀에게 달려간다. 요코는 교토의 시센도를 보고 싶어 하지만, 나는 시센도보다 요코에 대한 순수한 욕망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이다. 소설집 <환상의 빛>에서는 기묘한 순간에 죽음 혹은 상실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격발시킨다. 요코네 집에서는 가업을 이을 데릴사위를 찾고 있기에, 그녀와의 이별은 필연이다. 오래전 오사카의 어느 항구에서 봤던 박쥐처럼, 곤스케의 상념은 부서진다. 상남자였던 란도와 함께 오사카 항구에 산다는 묘령의 소녀를 찾아 나선 기이한 여정이 이어진다. 그 여행은 요코와의 교토여행과 대조를 이루며, 곤스케가 반추하게 된 삶의 진실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하게 될 필연적인 요코와의 이별에 방점을 찍는다. 이거야말로 신형철 선생이 추천한 담백하기 짝이 없는 일본 순문학의 맛이었던가.

 

<침대차>는 밤을 타고 달리는 야행열차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나는 내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야행열차를 타고 목적지 도쿄로 향한다. 우리네 삶에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던가. 야행열차를 타는 나의 준비물은 주간지 두 권과 포켓용 위스키가 전부다. 신칸센을 타면 더 빨리 도쿄에 다다를 수 있겠지만, 저혈압이 있는 주인공은 침대차를 선택한다. 야행열차의 완만한 울림과 사람들의 북적거림 그리고 독특한 정적이 주는 감상이 야행열차의 제 맛이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기계쟁이에서 능력 있는 영업사원으로 변신한 나는 파트너 고타니와의 합작품인 이번 계약에 얽힌 사연들을 회상하며 밤을 달린다. 그러던 중, 도중에 승차한 어느 노인의 통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가쓰노리와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자신에 집에 놀러 왔다 강에 빠져 죽을 뻔한 가쓰노리가 결국 대학교 때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미야모토 테루 작가는 동승한 노인 역시 그런 참척의 슬픔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독자로 하여금 하게 만든다.

 

그렇게 세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표제작인 <환상의 빛>을 읽기 시작했다. 한신 전차에 치어 자살한 남편을 그리는 유미코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남편과 그렇게 사별한 후, 유미코는 7년이 지나 오쿠노토의 소소기 바다에 새로 둥지를 틀게 되었는데 그곳은 짙은 초록빛 물색과 일 년 내내 해명이 울어대는 가난한 바닷가였다. 우리 같은 속물들은 당장 이제 막 태어난 아들 유이치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가 걱정인데, 정작 당사자 유미코는 남편이 왜 죽었는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죽은 남편이 그 이유를 들려줄 리 만무하다. 그에 대한 질문과 대답 모두 유미코의 몫인 셈이다.

 

죽은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유미코 역시 하루의 삶을 이어가고, 효고에서 멀리 떨어진 소소기 바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미야모토 테루는 그녀의 신산한 삶의 원형을 제공하는 과거사에 동반자살한 이웃의 돈을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아버지의 이야기와 역시 치매로 가출한 할머니의 실종이 가족 책임이라며 경찰들이 찾아와 가난한 자기 집의 다다미까지 뜯어내고 땅바닥을 파낸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과연 유미코가 소소기에서 새남편 세키구치 다미오 씨의 아내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싶어 하는 삶의 진실은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새남편 다미오 씨와 새출발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여전히 죽은 남편과의 대화는 계속된다.

 

<환상의 빛>을 다 읽고 난 소감은 솔직히 말해서 신형철 선생이 추천한 것처럼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해서, 나도 좋은 것은 아니니까. 좋다면 기발한 아이디어 혹은 구성이나 플롯이 좋다던가, 서사의 전개 기법이 좋다든가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죽음과 상실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에서는 나의 감성을 울리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나의 일본순문학에 대한 눈높이가 미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일본 출신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표제작 <환상의 빛>을 영화화해서 데뷔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그의 작품도 한 번 영화로 만나 보고 싶다. 아마 그렇게 되면 정말 유미코가 말한 그 소소기 바다가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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