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김영하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7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장미희 주연의 무슨 이민사를 다룬 영화라고 했는데 대종상 시상식에서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가 대종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설화를 겪은 것으로 기억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영화가 궁금해졌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1905년 메히코 이민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망해 가는 나라 조선에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신천지 묵서가[Mexico]로 떠난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젖과 꿀이 흐를 것이라고 생각한 라틴 제국의 실상은 오히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더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4년짜리 계약서를 작성하고 영국 선적의 일포드 호를 오른 천여 명의 조선 사람들은 현지의 에네켄(henequen) 농장에서 사실상 채무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20세기 초 메히코판 조선인 오디세이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4월 4일 지금은 인천으로 이름이 바뀐 제물포에서 시작된다. 성도 이름도 없는 장돌뱅이 김이정, 신을 버린 신부 박광수 바오로, 바오로 신부를 턴 도둑 최선길, 몰락한 황족 가문의 이연수 일가, 한 때 제국 군인이었지만 도시의 부랑자가 된 조장윤, 궁에서 퇴출된 내시 그리고 뜨내기 박수무당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다양한 캐릭터로 구색을 갖춘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였는데 “썰”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백성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외교, 군사권을 비롯한 국권을 차례로 일본에 빼앗긴 무능한 군주 고종과 국가 관료가 지배하는 이기론과 주자학의 나라 조선을 떠난 마당에도 여전히 세계에서 최악이었다는 신분제를 주장하는 사대부 이종도의 모습은 정말 씁쓸하게 다가왔다. 제 백성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놈의 공맹의 도를 타령하는가 말이다. 그에 비해 자신의 뿌리도 알지 못하지만, 보란 듯이 이역만리 메히코에서 성공하겠다는 앙칼진 다짐을 한 김이정이 당연히 부각된다. 그와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이종도의 딸 연수 역시 신세계에서 개화된 교육을 받아 거듭나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물론, 그들이 곧 접하게 되는 메히코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지만.

 

가톨릭 신부로 고향 위도를 떠나 신에 귀의하지만, 역설적으로 신내림을 받는 바오로 박서방도 눈여겨볼 캐릭터다. 그와 대척점에 서서 민중의 한을 씻기는 역할을 맡은 박수무당의 활약도 볼만하다. 메히코로 가는 뱃길에서 그리고 에네켄 농장에서 속절없이 죽어간 원혼들을 위한 진혼 카니발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가히 이 소설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농경민족의 혈관에 각인된 놀음의 유전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메히코 현지에서는 에네켄(henequen)이라 불리는 용설란은 선박용 로프에 사용되는 황금작물이다. 19세기 초,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유카탄의 아시엔다(대농장)의 농장주들은 에네켄 삼실의 효율적 생산을 위해 말도 통하지 않고 외교관계도 없어서 문제의 소지가 적은 조선인 노동자 수입을 유도한다. 이렇게 메히코 유카탄 반도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는 에네켄 농장에 투입된 조선 사람들은 제멋대로 어저귀 혹은 애니깽으로 불렀다. 하늘과 산 사이의 강산에 살던 조선인들은 열사의 땅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감독관의 채찍질과 생존을 위해 에네켄 수확에 내몰린다. 가혹한 농장주의 착취에 맞서 조선 사람들은 파업과 연대로 맞서지만, 메히코의 실제적인 지배자인 아시엔다의 농장주에게 속수무책이다. 조국의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도 띄우지만, 역관 권용준의 농간으로 그들의 참혹한 실상은 가려진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욱일승천의 기세를 탄 일본에게 병탄되고 만다.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자본가와 지주 계급 그리고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장기독재에 대항해서 시작된 메히코 혁명(1910~1920)이 등장한다. 엉뚱하게도 망국의 자손들은 얼결에 이 혁명의 와중에 휘말린다. 김이정은 메히코 혁명의 영웅 판초 비야의 북부 혁명군 진영에 참가하고, 연수의 새로운 남편이자 제국 군인 출신의 명사수 박정훈은 정부군 오브레곤 장군의 휘하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아무리 트로츠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미국 출신의 용병을 포함한 메히코 혁명군이라고 하지만 에네켄 농장 출신의 조선출신 혁명군 설정은 좀 멀리 나간 게 아닐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배운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그것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faction)에서 이런 개연성의 개입은 확실히 불편하다. 아시엔다에서 농장주와 감독관의 횡포에 맞선 조선인들의 궐기에 비해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 아닐까 싶다.

 

잊혀진 역사의 한 자락을 솎아낸 작가의 시도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한홍구 선생의 말씀대로, 역사가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소설가의 성취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이다. 하지만 조선의 망국, 신산한 조선 노동자의 삶 그리고 메히코 혁명이라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한 소재가 어떻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텍스트 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 아래, 아주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만 영화 <애니깽>과 어떤 점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정말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가독성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잘 맞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쟁여둔 다른 책들을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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