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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평점 :
문단에 늦깎이로 데뷔한 최제훈의 작가의 팬이다. 책은 작년에 출간되자마자 샀지만, 그동안 미처 읽지 못한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가진 빼어난 가독성을 알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좀 변명이 되려나. 거의 일 년을 묵혀 두었다가 지난 주말에 서가에서 신작 <나비잠>을 빼들었다. 역시나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고, 놀라운 속도로 다 읽어냈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보다는 긴 호흡의 장편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최제훈 작가의 <나비잠>은 전혀 길이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웠다고 해야 할까.
원래 다른 일을 하다가 문학 수업을 받고 문단에 뛰어든 때문인지, 엘리트 코스를 밟고 등단한 다른 작가와는 다른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최제훈 작가의 서사에는 장르적 특성이 추리가 담뿍 배어있다. 약간 누아르적이기도 하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의 주인공은 40대 중년의 최요섭 변호사다. 나이와 직업이 일단 그의 특질을 말해준다. 잘 나가는 대형로펌 <사해> 출신의 최요섭은 최근 들어 이상야릇한 악몽에 시달린다. 최제훈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서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일단의 연쇄적 사건과 꿈을 등치시킨다. 꿈에서 총 맞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벌써 범상치 않다.
웹진에서 연재할 적에는 제목이 <몰락>이었다고 하던데, 그 제목이 어쩔 수 없이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나비잠>보다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집에 꼬맹이가 있어서 그런지 어린 아이가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자는 잠이라는 뜻의 제목이 귀에 쏙 들어오기는 한다. 소설 <나비잠>은 지방 소도시 출신 목사의 아들로 한양공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로펌에서 승승장구하며 서울숲 고급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음대 출신의 미모의 아내에,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까지 무엇 하나 부러운 게 없는 우리 시대 성공방정식을 풀어낸 주인공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오소리 변호사라면 도저히 꿈꾸지 않을 억울하게 감옥소 신세를 지게 된 대리기사의 무료 변론을 맡게 되면서부터 잘 나가던 삶의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작가 세대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보던 <은하철도 999>의 서사부터 시작해서 <빨간 두건>, <돈키호테>, <피노키오>,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영화 <빠삐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 시스템을 소설 속에 투입시킨다. 특히 <빨간 두건> 일화의 금기(터부)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인상적이었다.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금기는 모두 깨고 있으면서, 타인에게 적용하는 최요섭의 이중잣대를 통박하는 빨간 두건의 퉁바리는 통쾌했다.
이렇게 작가가 투입시킨 이야기들은 꿈속에서 혹은 현실계에서 도주하면서 유년 시절의 잊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해결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털곰(털 많은 곰)이라는 캐릭터와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촉발시킨다. 한술 더 떠서, 목사였던 아버지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자 동시에 신의 저주를 받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로 배치하기도 하고, 막장드라마 단골메뉴인 출생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존하는 모든 서사 얼개는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이자면, 유년 시절 트라우마는 현란한 로드무비 같은 대모험을 거쳐 최 변호사가 31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선택적 기억상실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원죄에까지 도달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겪는 몰락의 서사는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꿈의 서사의 기이한 변용의 과정을 거쳐 현실계에서 반복된다. 길을 잃고 산속에서 헤매던 중, 가까스로 찾아들어간 외딴 민가에서 묘령의 여인에게 진수성찬이 차려진 음식을 대접 받다 불륜에 휘말려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의 우락부락한 사냥꾼 남편에게 봉변을 당하는 설정은 무간지옥의 다름 아니다. 최요섭의 무료 변론이라는 일탈과 유학생 사건 협잡으로 비롯된 그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개입으로 시작된 그의 몰락은 상상초월의 속도로 신속하다. 아내는 아들 과외 선생과 바람이 났고, 아들의 야구 특기생 진학을 위해 바친 뇌물 수수 혐의로 잘나가던 직장에서 짤리고 집행유예로 자격 정지 먹는 상황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제훈 작가의 장기 중의 하나인 추리적 요소가 개입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주인공 털곰을 이렇게 혹독하게 몰아붙인단 말인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주의하시라, 작가는 미스터리를 짜내는 데도 능수능란하지만 또 한편으로 두 가지 서사의 축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게다가 이미 여기저기서 차용해온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을 그야말로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현란한 이야기의 시전 속에서 과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빠삐용처럼 삶이 감옥이란 말이었을까. 무언가 기발한 문구를 기대했지만, 작가는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변호사 최요섭은 물질적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21세기 남자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모두 소소할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투입된 정의감에 불타는 이정우 변호사의 실존적 고민도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믿었던 조직에서 내몰리고, 재기의 물질적 토대라고 생각한 재산마저 날리면서 극한의 코너에 몰리자 예의 자신감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남은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면서 자신을 파멸시킨 원흉을 찾겠다고 동분서주한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변호사로 사적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던 최요섭 변호사의 처참한 몰락은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뫼비우스 띠처럼 얽힌 현실과 꿈이 만들어내는 변주곡의 코다는 어디일까.
이미지가 진실을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과연 최요섭 변호사가 쫓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게 신기루 같은 허상이었을까?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연봉, 모델 같은 미모의 아내 그리고 야구선수의 꿈을 꾸는 아들, 모든 것을 갖춘 이상향에 근접해 있었지만, 조직의 규율을 어긴 이탈자를 기다리는 건 휘황찬란한 비상이 아닌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작가가 보내는 중첩된 메시지 중에서 무엇을 골라잡아야할지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다. 어쩌면 그런 복잡다단한 우리네 인생의 답없음이야말로 최제훈 작가가 소설 <나비잠>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