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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과잉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어느 독자는 앞으로 읽게 될 소설을 접하기 전에 이미 다양한 언론 매체와 팟캐스트를 통해 해당 책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접했다. 그 독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책에 대한 선입견 내지는 작은 편견을 가지고 독서의 출발점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그 책은 바로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황정은 작가는 팟캐스트를 통해 매주 듣는 정감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우직하게 고수한다는 정도의 정보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통해 황 작가의 작품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됐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의 문장들을 자근자근 읊조리던 그녀가 갑자기 “씨발됨”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주제를 독자에게 날것 그대로 내던진 것이다.
소외된 이들의 부유하는 삶이 소용돌이치는 가상의 공간 고모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탕으로 한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단순한 성장소설 혹은 가정폭력에 대한 글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의 누락’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에, 이 불친절한 작가는 독자에게 풀 수 없는 숙제를 던진 느낌이다.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독자는 자신만의 독법으로 책을 읽는다. 충돌과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한편, 훈련된 독자는 이 소설의 결말에 가서 기대했던 종래의 기승전결 서사가 전달하는 뚜렷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어쩌면 이런 설정조차도 작가가 의도한 장치일까. 작가가 구사하는 모든 문장이 갖가지 의문부호를 달고 내딛기 시작한다.
묵직한 장편소설이 무엇이든 빨리 변하는 세태와 융합하지 못하면서, 등장한 경장편 소설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경장편이든 본격 장편이든, 그 그릇에 어떤 이야기를 담는가는 오롯하게 작가의 몫이다. 그렇다면 그 그릇에 든 음식을 소비하는 건 독자의 그것인 셈이다. 내겐 너무 불친절한 황정은 작가는 폭력의 형상화라는 요리하기 쉽지 않은 재료로 독자의 구미를 돋운다. 그래서였을까? 작가는 자신이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여장 노숙자에게서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원형을 본 것 같다. 독자는 당연히 앨리스씨는 누구이고, 그가 왜 야만적이라고 불리는지 궁금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약간의 확실하지 않은 추정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어디로 가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사거리에 선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는 방향성이 상실된 시대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나는 궁금하다. 소설에서 거듭되는 “씨발됨”이 대물림된다고 하는데, 어느 세대의 지고한 희생으로 예의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지. 앨리시어가 입에 달고 다니는 그 어휘는 폭력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가치전도된 가해자가 되어 내뱉는 변형된 언어폭력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앨리시어도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물림하겠지라는 냉소에 도달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것은 황정은 작가가 전개하는 폭력 3부작의 전초라고 한다. 1/3 지점에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퍼즐은 나머지 두 조각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난 속도전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