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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들 : 총을 든 사제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이성엽 옮김 / 씨네21북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주로 애용하는 램프의 요정 신간소개 코너에서 발견하고 바로 주문을 날렸다. 램프의 요정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일배송을 해주었다. 사무실로 하면, 보나 마나 배달하시는 분이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부러 집으로 배송을 부탁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푹푹 더위 속에서 르파주의 책을 펼쳤다. 오, 놀라워라!
개인적으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 무척 관심이 많지만, 그 먼 나라 니카라과에 대한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에 오월 출판사에서 나온 멕시코 출신의 작가 리우스가 그린 만화가 한 권 있는데 이건 절판돼서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어쨌든 헌책방에서 구해서 읽은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는 니카라과 혁명에 대한 거시적인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1976년 11월,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의 동쪽에 있는 산 후안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는 버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가브리엘 데 라 세르나는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가 정부군에게 체포된 꼬마 아가씨가 상상을 초월하는 악랄한 독재자 ‘타치토’ 소모사를 비난하는 소리에 적잖이 동요한다. 호아킨 신부는 자신의 오랜 친구 루벤 신부의 부탁으로 마을 성당에 벽화를 그릴 견습신부 가브리엘을 소개한다. 두 신부는 2대에 걸친 독재 왕국으로 니카라과를 좌지우지하는 소모사 정권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벤 신부는 가브리엘에게 자신이 담긴 진짜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하면서, 산 후안 마을 사람들를 크로키 하라고 말한다. 부유한 기업가의 자제로 평생 고생을 모르고 자란 가브리엘은 정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산 후안의 곳곳을 스케치하면서 혁명의 대의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루벤 신부가 반정부 게릴라들의 투쟁을 돕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브리엘은 미리 무기를 감추면서 성당을 수색하러 나온 정부군을 따돌린다. 하지만, 게릴라 활동에 동조하는 루벤 신부와 디에고가 체포되고, 성녀와 창녀 사이를 오가던 콘셉시온이 정부군 바르가스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가브리엘은 충격을 받는다.
니카라과 유력 가문의 자제로 자신의 정체성과 독재권력 밑에서 신음하던 니카라과 민중 사이에서 고민하던 가브리엘은 드디어 게릴라 전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까지가 1부의 내용이었다면, 2부에서는 성경 대신 총을 든 사제 가브리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니카라과 민중의 소모사 독재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혁명군 내부에서의 갈등,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나이들의 우정 그리고 금단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출신 르파주의 그래픽 노블은 거침없이 내달린다. 소모사 독재에 저항하는 작은 방법으로 니카라과 사람들은 소모사 소유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성냥 대신 라이터를 사용한다. 라이터는 저항군의 상징이다. 게릴라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촌락을 파괴하고 주민을 소개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소위 정부군의 활동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가담한다.
게릴라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살인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어뜯는 견습신부 가브리엘의 인간적 고뇌가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는 콘셉시온 마르티의 죽음도 가브리엘의 자각에 일조한다. 혁명이 끝난 뒤, 콘셉시온을 형상화한 그림 앞에 꽃을 두고 돌아서는 부에나벤투라의 모습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니카라과 혁명의 전반을 다룰 수 없는 제약은 오히려 서사의 밀도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긴 혁명 과정에서 일어났을 법한 작은 이야기로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하게 부르주아 청년이 신부에서 게릴라가 되는 과정 뿐만이 아니라, 세속의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이 민중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긴 울림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