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혼 을유세계문학전집 37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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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러시아 소설에 대해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 유명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작년에야 비로소 읽을 수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도전할 계획인데,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불리는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을 주말 동안에 다 읽었다.

우크라이나 폴타바 부근 출신의 니콜라이 고골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은 혼>은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죽은 혼>에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전 유럽에 퍼진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는 물론이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새로 재편된 메테르니히 체제의 보수적 사회 분위기,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어느 시대에서나 빠지지 않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야심가의 모험담이 전개된다.

그 당시에도 일반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직접 소설에 개입해서 독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주인공의 활동을 기술하는 고골의 작법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지방도시 N에 사륜마차를 타고 수행원과 함께 등장한 우리의 주인공 파벨 이바노비치 치치코프는 정중한 매너와 백만장자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일약 N 도시의 유명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도시의 고위층이 다투어 그를 파티에 초대하고, 귀부인들 역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치치코프라는 이름의 귀족이자 6등 문관은 이상한 것을 매집하는데 정성을 쏟는다. 그것은 바로 죽은 농노다. 아직 근대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19세기 러시아에서 토지와 그에 예속된 농노는 사회 주류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였다. 그들이 흥청망청 벌이는 파티와 산해진미의 음식들 그리고 파리에서 유행하는 최신 패션 따라잡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귀족이 보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농노의 노동이었다고 고골은 증언한다. 그런데 살아 있는 농노도 아닌 죽은 농노를 치치코프는 왜 사는 걸까?

죽은 농노에게도 인두세를 부과하는 러시아 정부의 모순을 파고들어, 치치코프는 죽은 농노를 사들여 담보로 삼아 거액의 대출을 받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치치코프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책의 300쪽이 넘어가서야 비로소 고골은 독자에게 치치코프가 누구인지 소개한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재무국, 건설위원회 그리고 세관원이라는 요직을 거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전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작자를 선량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법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치치코프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마닐로프, 무상으로 농노를 제공하다시피 하는 코로보치카,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거래를 시도하려는 소바케비치에게서 농업국가 러시아의 현실을 엿볼 수가 있다. 치치코프의 사기 행각이 거의 성공할 단계에서 불한당 노즈드료프의 폭로 때문에 치치코프는 그만 나락으로 추락한다.

여기까지가 1842년에 발표된 1권의 주된 내용이라면, 1845년에 발표된 2권에서는 재기에 몸부림치는 치치코프의 활약이 그려진다. 2권에서는 종교적 귀의를 연상시키는 고골 만년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구제받지 못할 사기꾼의 길을 걷던 치치코프는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 건전한 영농사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지주의 영향으로 한때 정직한 사업가의 꿈을 키우는 장면에서 기독교적 구원이라는 모티프에 영향을 받은 작가의 면모가 보인다. 하지만 악당의 선량한 주인공으로의 극적인 변신은 19세기 소설에서 무리한 시도였을까? 치치코프는 정상적 삶의 궤도로 안착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미망인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유언장 위조를 시도한다.

19세기 러시아 농촌사회와 상류사회에 대한 고골의 사실적 묘사에는 당시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듯한 현장감이 흐른다. 치치코프가 찾은 시골 마을에서 돼지가 병아리를 냉큼 집어삼키는 장면에 대한 묘사나 치치코프가 사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코페이킨 대위 아니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상상은 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로 어수선하던 시대상의 반영으로도 읽힌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코시카료프 대령의 계몽주의적 개혁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농민들의 반발로 무위로 돌아간다. 지식인이었던 고골은 이런 시도가 러시아 농촌사회에서 아직은 시기상조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고골이 세상을 뜬 후, 9년 뒤에야 러시아는 농노해방령을 선포한다.

한편,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민족주의 성향도 소설의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유럽의 후진국으로 간주되던 러시아가 여러 내부의 모순에도 열강의 하나로 성장하던 시기에 프랑스 스타일로 대변되던 유럽문화는 동경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상류층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 사용을 선호한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고골은 건전하고 근면한 러시아적 가치와 노동의 신성함을 은근하게 강조한다.

2권에서는 소실된 부분이 많아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맹점이 있긴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당시 러시아에서 통용되던 다양한 관용적 표현은 확실히 주해가 없었다면, 현대의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미주보다는 각주가 더 보기 쉬운데, 미주 표시가 나올 적마다 책장을 뒤로 넘겨야 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지난달에 읽은 안톤 체홉과 이달에 읽은 니콜라이 고골의 책을 통해 그동안 줄기차게 괴롭히던 러시아 소설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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