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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ㅣ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시공사에서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중인 시리즈의 한 편인 바진 선생의 <차가운 밤>을 읽었다. ‘인민작가’라는 호칭으로,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모두 체험하며 101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영면한 노작가 바진이 문학적 완숙기에 발표한 <차가운 밤>(1947)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임시수도 충칭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바진은 소설의 중심축에 기존 왕조중심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촉발시킨 신해혁명 이후, 표출된 전통가치와 신문화의 충돌을 배치한다. 여자는 모름지기 집에서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며 지아비를 내조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를 하는 주인공 왕원쉬안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 청수성이라는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정면대결을 벌이면서 중국판 ‘사랑과 전쟁’을 엮어낸다.
만주에 이어 중국 전토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폭력적 제국주의 침략 앞에, 전시 임시수도 충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다. 죽음을 상징하며 일상화된 적기의 공습경보는 이제 친근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불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반 국영기업의 출판사 편집부에서 교정을 담당하는 왕원쉬안은 빈곤과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은행에 다니는 아내 청수성은 애당초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가 자라면서 교육비 부담은 날로 느는데, 그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왕원쉬안은 아이들 교육에 중국의 미래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의 꿈을 키우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심각한 불화로 자신의 꿈 따위로 고민할 여유가 없다. 수성에 대한 애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대학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수성은 지금보다도 앞으로의 삶이 더 걱정이다. 신여성답게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기고, 브리지 게임을 하지만 그녀 역시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이런 수성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질색하고, 며느리를 비난한다. 대략 요즘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연상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바진은 대척점에 서 있는 이 두 여성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꼬집는다. 근대화를 지향하면서도, 과거의 유산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고민을 왕씨 가족의 불화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인텔리의 모습은 조금은 진부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원쉬안은 가정 내부의 모순을 항일전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저 무조건 참아내면, 지금의 불행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판이었다. 결국, 원쉬안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불행의 열차는 폭주를 시작한다. 이런 구조는 외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 정부의 무능력을 왕씨 집안의 가장인 원쉬안에 대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승전의 순간에 맞는 죽음은 비극 그 자체로 다가온다.
중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던 바진의 글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정치적인 암시와 복선을 제시한다. 세 주인공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와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폭력 상태를 통해 당시 중국 민중이 가지고 있던 불안의 본질을 조명한다. 중년으로 접어든 혁명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원쉬안과 수성의 갈등 속에 바진은 멋지게 녹여낸다.
이 소설에서 ‘차가운 밤’은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아내와의 이별의 순간이며, 마지막에는 비극의 조종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무정부주의를 꿈꾸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대작가 바진과의 첫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그의 다른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만간 바진과의 새로운 랑데부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