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0년 2월에는 나는 그만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꽂혀 버렸다. 불과 며칠 사이에 3권의 책을 읽었고, 가장 인기 있다는 <적의 화장법>이 대기 중에 있으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배고픔의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제비 일기>와 <오후 네 시>를 반납하러 갔다가 또 다른 수작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책을 빌려다 다 읽어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앞에 읽었는지 책이 그야말로 걸레처럼 헤져 있었다. 껍질이 헤졌다고 해서, 그 내용도 헤지진 않았더라. 하루를 마감하고, 침대에 누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83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로 22권의 소설을 펴낸 프레텍스타 타슈가 죽을병에 걸렸다. 연골 조직이 파괴된다는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이라는 정말 희귀한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괴팍하기 짝이 없는 언행에, 음식에 대한 탐욕으로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타슈에게 유일한 낙은 먹는 것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문호의 죽음을 앞두고, 그가 죽기 전에 인터뷰를 진행하겠다는 욕심에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타슈와 인터뷰를 갈망한다.

<살인자의 건강법>은 이렇게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서게 되는 타슈의 5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말 특이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대문호의 현란한 언어유희에 기자들은 차례로 나가떨어진다. 기세 좋게 덤비는 기자들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노회한 작가의 방어 기제의 발현은 사실 통쾌하기까지 하다. 22권이나 되는 그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죽어가는 대작가를 분석하겠다고 달려드는 얼치기 글쟁이들에게 타슈는 타이슨의 주먹 같은 KO 펀치를 날린다!

사실 59살에 절필을 선언하고, 그전에 미리 써둔 원고를 까먹던 그에게 삶이란 단조롭기 그지없는 시간에 불과했던 걸까?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불나방같이 기세 좋게 덤비는 기자들을 차례로 녹다운시킨다. 걸프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진행되던 인터뷰는 기자와 노작가 사이의 공격과 방어를 연상시킨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감추지 않는 타슈의 타고난 뻔뻔스러움에 그만 질려 버렸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노회한 작가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그런 타슈에게도 드디어 호적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30살 난 니나라는 이름의 여성 기자였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22권에 달하는 타슈의 모든 저작을 꿰고, 인터뷰에 임한다. 수년간의 저작생활에 닳고 닳은 타슈도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니나의 파상공세에 결국 끝까지 자신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비밀을 간파당하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 구성과 소재의 선택이 참으로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아멜리 노통브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노통브의 페르소나는 대문호 타슈와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혹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신문 기자 니나의 그것과 혼재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손이고, 자위적인 쾌락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도 손이라는 그의 궤변에는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아울러 니나 전의 네 명의 인터뷰 기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슈의 오만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캐릭터를 조금씩 설명해 나간다.

조금씩 공고하게 굳어진 대작가라는 권위와 가식의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인간 타슈에게 접근해 가는 노통브의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렇게 혐오하고 모욕감을 안겨준 ‘여성’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자신이 고이 간직해온 비밀마저 들통이 나 버리는 과정이 아주 통쾌했다. 어쩌면 그는 글쓰기를 포기한 지난 사반세기 동안 자신을 끝장내줄 니나 같은 인물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노벨상 수상작가인 자신을 치켜세워줬지만, 그는 자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조롱하며 자신의 살인충동과 분노 그리고 황홀경을 이어갈 아바타를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마침내 적합한 자신의 화신을 만난 그가 더 바랄 게 있었을까?

이렇게 기발한 소재를 가지고, 정말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법적 주술을 아멜리 노통브는 소환한다. 문학을 둘러싼 허위와 위선을 분쇄하고, 개인적 감정에 충실하라는 그녀의 주문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작품을 카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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