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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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기호 작가의 장편소설이 나왔다. 제목은 <사과는 잘해요>, 궁금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이 ‘사과’라니. 보통 그 제목에 작가가 그 작품에서 하고 싶은 주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했을 때, 이기호 작가는 이번 자신의 첫 번째 장편소설에서 사과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이나 하고 싶었나 보다.

<사과는 잘해요>를 읽기 전에 이기호 작가의 <독고다이>와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다. 전자는 작가의 짧은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었고, 후자는 한 번 들으면 다시는 잊지 않을법한 그런 타이틀을 가진 단편모음집이었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작가 특유의 구수한 입담과 이기호 작가 작품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촌철살인”의 유머를 체험할 수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달고 나온 네 번째 책에 해당하는 <사과는 잘해요>는 시봉과 주인공 진만이 시설을 탈출하게 과정을 무덤덤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원장과 그의 두 명의 조카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갖은 폭력과 착취 그리고 억압을 자행하는 예의 시설을 진만은 제 발로 스스로 찾아왔다고 하고, 시봉은 어느 날 승합차에 실려 왔다고 한다. 작가는 이번에도 역시나 사회에서 약간은 소외된 이 두 청년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모두 세 꼭지로 이루어진 <사과는 잘해요>의 각 장의 제목에서 어김없이 죄(罪)를 찾아볼 수가 있다. 진만은 이 죄에 대해 아주 친절한 설명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두 명의 복지사들의 폭력이 가해지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이들의 죄를 밝히고 사과하라는 전제가 주어진다. 그저 쏟아지는 주먹과 몽둥이세례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죄 혹은 앞으로 저지르게 될 죄에 대해 고백하게 된다. 죄를 짓고 징벌이나 사과를 하게 되는 상식의 틀을 벌어나, 징벌이 우선하게 되는 가치 전도의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시설을 떠나 사회에 복귀하게 된 주인공들은 시봉의 여동생 시연을 찾아간다. 시연은 자기보다 자그마치 16살이나 연상의 뿔테 안경 남자와 함께 산다. 뿔테 안경 남자는 경마에 미쳐 아롱이에게 시연이 어렵사리 벌어온 돈을 모두 먹이로 던져 주는가 보다.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시봉과 진만은 자신들이 서식처를 배회하며, 일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 등장하는 아주 멋진 조연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그분은 동네 슈퍼 아주머니! 주변의 거지 같은 상황에 진저리를 치면서 항상 동네를 떠날 궁리만을 하고 있다. 슈퍼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던질 때마다, 작렬하는 유머의 포스에 그만 반해 버리고 말았다.

자, 허우대 멀쩡한 시봉과 진만이 언제까지나 시연에게 기생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이 시설에서 배운 포장 다음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사과를 가지고 돈벌이를 할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우선 형제 이상으로 다정하게 지내던 정육점 아저씨와 과일가게 아저씨를 수일간 관찰하고 드디어 행동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결과와는 달리 사과를 통한 관계회복이 아닌 관계파탄을 가져 오고 만다. 그다음에 정식으로 의뢰받은 김밥집 아주머니와 그 아들을 버리고 10년 전에 도망간 아버지 사건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이 책은 다 자란 청년들의 성장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장 16년에 걸친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 다시 취업학원에 다닌다는 작금의 세태를 조롱하듯이 이기호 작가는 그야말로 ‘갈팡질팡’하는 청년들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봉과 진만이 머물던 시설은 정상적인 청년들이 받는 교육과정을 상징한다. 무척이나 권위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원장과 복지사는 알약과 위생 그리고 폭력이라는 삼위일체로 무장한 채, 체제순응적인 원생들을 길러낸다. 이런 비슷한 장면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

한 판 유쾌한 코미디를 기대하게 만든 초중반의 전개와는 달리 작가가 초반부터 곳곳에 매설한 복선과 암시의 지뢰들은 언제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그런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정상궤도에서 일탈한 시봉과 진만의 해피엔딩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파국으로 치닫는 그들의 저돌적인 행태를 보면서 가슴이 아련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과는 잘해요>는 1년 전 대표적인 포탈 서비스인 다음에서 연재한 글을 모아 재가공해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신문연재가 대세였다면, 요즘에는 인터넷 포탈이나 온라인 서점 연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 인터넷 연재를 했던 작품답게 예전에 자신의 단편집에서 이기호 작가가 보여준 짧은 호흡의 전개가 그대로 구사되고 있었다. 솔직히 <사과는 잘해요>의 물리적 분량에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점이 바로 <사과는 잘해요>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 게 아닐까. 다음번에는 조금 더 긴 호흡의 장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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