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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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상에 없는 82세의 노작가의 마지막 백조의 노래와도 같은 책을 만날 수가 있었다. 마크 트웨인 이래 미국 최고의 작가라는 호칭을 얻은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지난 4월 달에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마치 그의 작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듯 그렇게 그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나라 없는 사람>은 자신의 평생을 반추해 보는 작가의 자전적인 에세이처럼 다가온다.

미국에서 독일계 후손으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징집되어 참전하기도 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1944년 12월 14일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동부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이송되었다. 노작가는 드레스덴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도중, 영국군과 미군이 추축이 되어 감행한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대폭격으로 드레스덴 시가지가 불타고, 13만 5천명이 살상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 인류 역사상 유래 없었던 대참상은 훗날 커트 보네거트를 반전 평화주의자의 길로 인도한다. 아울러 이 사건은 향후 작가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 세계에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에 사는 보네거트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은 (자유와 정의, 평화가 없는)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소수의 얼간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은 그 헤게모니와 방향성을 상실한 채, 국민들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해 마지않고 있다.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동지로 부시 행정부 시절 내내 부시 대통령을 갈구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을 들 수가 있겠다.

구닥다리 작가답게, 컴퓨터로 쓱싹쓱싹 쳐나가는 글보다는 손수 타이핑을 하고 교정을 봐서 전문 타이프라이터에게 자신의 육필 원고를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산 마닐라 봉투에 넣어 우체국에 가서 붙인다. 그리고 한 점의 스스럼도 없이 뻔뻔하게 예의 우체국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노라고 고백한다. 그의 솔직한 고백과 글쓰기에 대한 태도가 너무 편하게 글을 찍어내는 요즘의 그것과 변별이 되어서 그런 진 몰라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두 13편의 에세이와 각장의 시작마다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 ‘보코논’ 혹은 자신의 이름으로 쓴 묵시적인 교훈들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스스로가 수다쟁이라고 칭하는 커트 보네거트는 철지난 옛 이야기처럼 대가족제의 장점을 설파하고, 그 중요성에 살짝 방점을 찍는다. 핵가족제가 시대의 트렌드마냥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시기에 어느 노땅의 반란처럼 다가온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생각을 숨기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발명품 중에서 특히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대놓고 드러낸다. 특히 아프리카계 흑인들에게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블루스는 모든 음악의 원조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흠,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두려움으로부터 방어하는 기제로서 유머에 아주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어려서부터 타인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어서 웃기는 말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보네거트의 솔직담백한 고백에 웃음꽃이 슬그머니 피어오른다.

자유와 정의가 꽃피울 자신의 조국 미국을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갖 사회의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는 미국을 어느 날 화성인이 침공해 주기를 내심 바라는 이중적인 면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희망을 다른 곳이 아닌 오늘도 열심히 공공도서관에서 금지된 책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서들에게서 찾는다. 그에게는 텔레비전도, 신문 같은 대중매체들도 하나 같이 믿을 수가 없는 존재다. 오로지 책만이 우리에게 진리(veritas)를 전해 준다고 역설한다.

역시 평화주의자답게 기존의 미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존의 (전쟁) 영웅상에도 반기를 든다. 마초주의로 무장한 영웅들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 주목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오스트리아 출신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손씻기 운동을 언급한다. 수많은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제멜바이스는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손씻기를 제안한다. 그에 대한 후폭풍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네 평범한 영웅들의 말로가 그렇듯 제멜바이스 역시 기존의 의학계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의 <나라 없는 사람>은 팔순을 넘긴 노작가가 이 세상과의 이별을 앞두고 부른 ‘백조의 노래’처럼 다가온다. 아들과 세상살이의 본질에 대해 마치 선문답을 하듯 대화를 하고, 자신이 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 농담을 하며 작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매조지할 준비를 차분히 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얼마 전에 읽은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대작가와 담배를 같이 피우기도 했다는 닉 혼비가 어찌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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