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신윤복
백금남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사실을 가지고 쓰는 팩션이란 장르는 매우 유혹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양날의 칼 같은 느낌이다. 얼마 전, 읽었던 로버트 해리스의 <임페리움>의 경우에 마르쿠스 키케로의 생애를 그리면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질 정도의 치밀한 고증이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었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할 <소설 신윤복>의 경우는 어떨까?

2008년 문화계를 휩쓸고 있는 키워드는 바로 신윤복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바람의 화원>이, 영화에서는 <미인도>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시류에 편승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서로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나름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영정조 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그리고 혜원 신윤복의 일대기가 백금남 씨의 구성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궁금한 것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강세황-김홍도 그리고 신윤복의 관계가 정말로 큰스승-스승 그리고 제자의 관계였냐는 것인데, 아마 책의 제목에 붙어 있는 대로 “소설”이라는 단어가 이런 논쟁을 슬쩍 비켜나게 해주지 않았나 하는 추론을 해본다. 영조 대에 사도세자와 더불어 풍류를 즐겼던 강세황은 장차 보위를 이을 세자의 총기를 흐리게 하는 환쟁이라는 누명을 쓰고 영조 앞에서 진검승부를 펼쳐 보이게 된다. 그의 출중한 실력에 감탄하는 영조는 그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나, 강세황은 짐짓 사양한다.

중국 남종화의 영향을 받은 강세황은 사실보다는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인화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시서화(詩書畵)의 조화를 이루고 먼저 예인(藝人)은 인격을 수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단원은 그 스승의 도를 깨우치고, 풍속화를 그리면서도 속기(俗氣)를 배제한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어간다. 반면, 역시 강세황과 스승 단원으로부터 그 뛰어난 재기를 인정받지만, 춘화를 그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와 몰락한 집안의 한을 그대로 이어받은 혜원은 직접적인 사물을 묘사하고, 당시 지배층이던 사대부 양반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시대정신의 발로인지 절대군주 정조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춘화들은 민간에서 계속해서 범람하고, 걷잡을 수 없을 수준에 다다른다. 한편, 단원은 자신의 제자 윤복에게 한(恨)을 가르치기 위해 최북 선생에게 애제자를 의탁한다. 스승 단원은 서치홍포, 쥐와 무가 그려진 그림을 불가에서 화두(話頭)를 던져 주듯이 내주며, 쥐와 무외에 다른 그림이 있다는 언질을 주며 윤복에게 깨달음을 얻으라고 주문한다.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일가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는 표암이나 단원과는 달리 끓어오르는 젊음과 가족의 한에서 비롯된 정념을 안고 사는 윤복에게 그림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게다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어쩔 수 없이 기녀가 된 누이와, 어려서부터 정분을 나누던 애인 송이와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상황 앞에서 윤복은 화원에서 그림만 그릴 수가 없었다. 결국 임금조차 말릴 수 없었던 윤복의 일탈이 시작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이문열’의 <금시조>가 떠올랐다. 그 글에 보면,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 고죽을 그의 스승 석담 선생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비인부전(非人不傳: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겠다)의 왕희지의 일화가 <소설 신윤복>에서도 반복됨을 느꼈다. 옛 선인들은 그림을 그리는 재주보다도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으로 대변되는 서화의 정신으로 쳤다. 그런 점에서 신윤복은 기예는 뛰어나지만, 서화의 정수에 득도하지 못하고, 지나친 속기가 그의 기예마저 망친다는 표암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팩션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을 가지고, 그 사실 중에 빠진 부분들에 작가의 상상력을 채워 넣는다는 점이다. 신윤복의 생애도 그가 그린 그림들 말고는 상당 부분에 물음표가 찍혀져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이렇게 좋은 소재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심지어 그가 여자라는 주장까지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소설 신윤복>에서는 불가한 이야기다. 조선조 여성성을 그리기 위해서라도 그의 존재는 반드시 “열혈대장부”여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대척점에 서 있다.

등장인물들의 세부묘사와 곳곳에 포진해 있는 지금도 볼 수 있는 그림들에 대한 설명들의 조화는 팩션 장르가 가진 장점을 만개해 주었다. 하지만 팩션에서 더 나아가 김홍도가 일본에 건너가 우키요에의 대가를 이룬 도슈샤이 샤라쿠라는 주장은 너무 많이 나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고증에 근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복의 사형으로 등장하는 김득신의 경우에는 17세기에 살았던 이로 화적 떼에게 살해된 김득신과 화가 김득신 동명이인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인데, 작가가 어떻게 대답할지 못내 궁금하다.

그리고 김응환과 단원이 일본 지도를 그려 오라는 정조 임금의 명을 받고 대마도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는 부산에서 죽었다고 나온다. 그 외의 연풍현감 발령 등의 시간적 구성에서도 역사적 사실과는 많은 차이점들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전가보도의 무기처럼 이 책은 “소설”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인간사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애증으로 점철된 관계도 또 없을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지만 스승의 그림자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이루어야하만 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이, 청출어람의 고사처럼 문화와 예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하는 정수일 것이다. 회화가 품고 있는 정신세계의 구현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현현시키겠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자긍심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 고통의 순간, 혜원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의 필생의 역작을 탄생시킨다. 지은이가 표현한 대로,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책을 읽으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확실히 재밌는 책이긴 하지만, 팩션 장르에서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다 철저한 고증의 부족과 연대기적 시간 구성의 결여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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