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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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24일은 홀로코스트 이전 최대의 제노사이드였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106주년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의 파올로 코시가 쓰고 그린 <메즈 예게른>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읽었던 그래픽 노블이다. 지난주에 인천에 갔다가 찾아서 다시 읽게 됐다.

 

좀 더 디테일한 부분들이 알고 싶어서 너튜브를 검색해 보니 터키 사람으로 보이는 너튜버가 오스만 터키 입장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집단학살은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메즈 예게른>은 철저하게 피해자였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그래픽 노블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 지난 십년 동안,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부정하는 터키인들의 입장은 아예 무시해왔다. 그런데 오늘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오스만 터키의 군인들과 관료들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가혹하게 다룬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1877년 노토전쟁(러시아-터키 전쟁) 당시,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을 부추겨서 종주국 오스만 터키에 저항하도록 사주했다. 그 결과, 터키의 술탄은 1895~1897년 사이에 1차 대학살을 명령해서 30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였다.

 

그 후에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반란활동은 계속됐다. 일단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 요인 암살과 테러 활동을 개시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립을 약속한 러시아 편에 붙어 터키에 불리한 전황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은 쏙 빼놓고, 오로지 오스만 터키의 잔학행위에만 초점을 맞춘 점에 대해서는 <메즈 예게른>이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터키가 이주정착법이라는 명목 하에,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상상을 초월하는 오스만 터키인들의 만행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해 파올로 코시 작가의 기술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오스만 터키인들이 무슬림인데 반해 아르메니아인들이 기독교도라는 점도 비극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 민족갈등에 종교분쟁까지 겹치니 강제이주 과정이 잔혹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리라.

 

오스만 터키의 위정자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조국에 충성스러운 신민이기를 바랬으나, 서구 열강의 사주로 민족자결주의가 고조되어 가고 오스만 제국의 예전의 영화를 잃어 가고 있던 마당에 적국에 협력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조국의 배신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부분을 알고 나면, 오스만 터키가 저지른 잔학행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발칸전쟁으로 500년 이상 지배해온 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 그리고 몬테네그로를 상실한 오스만 터키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치명적 판단착오를 하게 된다. 철저하게 중립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동맹국인 독일 편에 선 것이다. 국방 장관이었던 이스마일 엔베르가 가장 열렬하게 독일 편에 설 것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카프카즈 전선에서 러시아를 상대하게 된 오스만 터키 3명의 실력자들은 1915424일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이주를 명령했다. 그것이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의 출발점이었다.

 

청년 투르크당 소속의 국방 장관 엔베르 파샤, 내무장관 메흐메트 탈라프 파탸 그리고 해군성 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들은 철저한 투르크족 우월주의자들로 대학살을 주도한 슈퍼빌런으로 등장한다. 그래픽 노블에서는 오스만 터키 부대에 소속된 아르메니아 병사들의 무기를 빼앗고, 무장이 해제된 그들에게 총알세례를 퍼붓는다. 물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의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신민들은 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그리고 상상이 가능한 모든 죽음의 방식들이 뒤따랐다. 흑백의 그래픽으로도 비극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전까지만 해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아무런 죄가 없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인식해 왔는데, 이번에 다시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좀 더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이탈리아 작가인 파올로 코시가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이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점이 좀 아쉽게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지나간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터키인들의 치졸하고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주장도 새겨들을 만한 포인트들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가 허구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고의적으로 억압, 은폐, 상대화 그리고 역사적 의미의 변화를 통해 실재했던 사건을 희석화하는데 정진하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정한 사과와 그에 따른 화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것도 하나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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