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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평점 :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빌렸다. 소설의 초반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청춘들의 모습이 비슷하던지 깜짝 놀랐다. 독일 청년의 모습에서 오래전 나의 그것을 엿본 느낌이었다.
어려서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렇게 학교에 다녔다. 사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무제한의 자유는 곧바로 방종으로 이어졌다. 그전까지는 입에도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고... 아마 그 시절 나는 요즘 말하는 ‘또라이총량법칙’에 따라 똘짓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오래가지 않았지만 정상궤도에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던 것 같다.
소설 <감정의 혼란>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의 대학으로 진학한 화자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못지않은 방탕함을 선보인다. 수업을 제끼는 것은 기본이고, 대도시 베를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휩싸여 학생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산다. 그러다 무심코 방문한 아버지의 말없는 준엄한 꾸짖음에 환골탈태하여 베를린을 떠나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새출발에 나선다.
이야기의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소설의 서두는 이제 은퇴를 앞둔 노교수의 회고로 시작한다. 천편일률적인 상찬 대신,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한 고백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어떻게 해서 학문에 대해 그런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되었나에 대한 잔잔한 소개가 이어진다.
원래 선원을 꿈꾸던 화자는 대학 교육은 일단 마치라는 아버지와 타협해서 일단 영문학을 전공한다. 그것도 훗날 선원으로 배에 올랐을 때, 동료 선원들과 소통하기 위한 대전략의 일원이었다. 새로운 대학에서 화자는 진짜 스승님을 만나,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교수님은 학생들과의 열린 토론 같은 세미나에서 그야말로 찬란한 스승의 광휘를 발산한다. 그 세미나의 주제는 셰익스피어였다. 속된 말로 당시 영국이 소유한 식민지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던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바로 그 셰익스피어 말이다.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어느 한 사회가 문학적 에너지를 분출할 특별한 시점이 있다고 한다. 하긴 셰익스피어나 돈키호테 같은 대문호들이 매년 양산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화자는 그동안 자신의 무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끝을 알 수 없는 학문의 세계로 도약한다.
바탕한 생활을 경험했던 이들은 그 시절의 무용함을 깨닫고, 자각의 순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자신이 매료된 분야에 정진하기 마련이다. 소설의 화자가 바로 그런 별의 순간을 경험했던 모양이다. 물론, 자신의 선생님이 일방적 강의와 젊은 학생들과 의견을 나누는 세미나식 수업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에 일견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열정 앞에 백기투항한다. 아예 선생님네 집 위층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으로 공부욕심에 매진하기 시작한 화자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자신이 사랑하게 된 학문에 그야말로 몰빵한다.
젊은이답게 너무 공부에만 매진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라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수영하러 나섰다가 사모님(그 때는 미처 몰랐다!)에게 집적대는 불경을 저지르기도 한다. 왜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가진 선생님이 글을 쓰지 않느냐고 채근해서, 결국은 자신이 받아쓰기를 하겠다며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화자가 경험하는 방탕의 시간들과 공부욕심에 젖어 충만감과 끝없는 희열에 빠지는 모습에서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본질의 차이는 다를 게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일견 소모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나중을 위한 소비적 투자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냉온탕을 오가는 선생님의 반응에 나(롤란트)는 혼란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스승과 제자가 대단한 성취를 이룬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관계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증오하고 적의 그리고 모욕으로 이어지는 감정에 소년 롤란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는 자신의 그런 부추김이 기쁨의 원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롤란트의 일탈과 선생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독자는 스승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모든 삶이 그렇지만, 언제나 만만한 게 아니었다.
왠지 불안했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고 격정적인 감정의 파고가 그렇게 지나고 나니, 그 뒤에는 잔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 확실히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은 그의 장끼인 역사평전하고는 결을 달리한다. 자신이 살던 시기의 광기에 맹렬하게 도전장을 냈던 저술가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떤 이의 기구한 숙명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소년 롤란트가 어른이 되어가던 과정에 체험하게 된 뜨거운 열정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걸까.
돌아온 탕자는 불과 한 학기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방황을 마치고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않았던가. 그 다음 시기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학구열에 불타는 심정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닫겠다는 그런 도전을 했다. 나이든 꼰대는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그리고 모든 일에는 시간과 순리가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경험이 일천했기에 알 방법이 없었다. 롤란트처럼 한 시절을 헌신할 만한 그런 놀라운 학문적 체험과 지식의 전수자를 만나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뭐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