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에 걸쳐 진주박물관과 건들건들 팀에서 제작한 화력조선 시리즈 가운데, 1467년 함길도 만령전투와 1555년 을묘왜변 영상을 너튜브로 보았다. 역시 너튜브가 대세인 시대구나 싶었다.

 

우선 전자인 만령전투부터 살펴보자. 계유정난을 통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오른 수양대군 출신 세조는 세종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전통적 유교질서인 적장자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1도 없는 그런 군주였다. 그런 자신의 핸디캡을 지우기 위해, 단종이야말로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인사들을 이른바 살생부라는 명목 아래 숙청했다. 유교적 질서 타령을 하는 사대부들을 통제하고 체제유지를 위해 중앙집권적 철권통치를 행사했다. 이 와중에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함길도를 비롯한 북방 지역에서 지역 출신 인사 대신 중앙 출신 관리들을 현지에 파견하면서 현지인들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지중추부사와 회령 절제사를 지낸 함길도 길주의 호족 출신 이시애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동생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와 모의해서 세조 13(1467) 516일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거병에 나선다. 당시 5월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니, 세조가 야심차게 실시한 호패법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효문 역시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한 비위 문제로 탄핵당할 위기였다.

 

화력조선은 이런 역사적 배경보다는 주로 이시애의 반란군과 조정이 파견한 도총사 구성군 이준(26)과 남이(26) 그리고 강순(77)의 정부군의 대결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시애가 이끄는 반군은 조정의 중신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내응한다는 선전전까지 전개해서 이에 넘어간 세조는 그들을 반란 초기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구공신들을 믿을 수 없게 된 세조가 이준과 남이 같은 젊은 장수들을 중심으로 발탁했던 것 같다.

 

14675, 길주에서 막이 오른 반란은 강원도 철원까지 진출하며 기세를 올린다. 당시 이시애 반군의 주력은 익속군 4,500명 가량으로 <화력조선> 영상에 따르면 이 중 1/4 정도가 화포 무기로 무장했다고 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변방에서 근무하면서, 여진족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 당시 조선 최강군이었다.

 

왕족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훗날 영의정 대리까지 오른 약관의 총사령관 구성군 이준은 3만의 관군을 중심으로 반란군 요격에 나선다. 도총사 이준은 반군 진압에 화약 병기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사전총통(세중전) 삼총통(차중전) 완구 그리고 화차 같은 화약 병기의 보급을 요청했다. 이시애가 이끄는 반군은 곧바로 시작된 정부군의 반격으로 함길도로 후퇴하고, 북청 포위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영상에서 다룬 1467731일경, 만령전투는 반란 진압의 승부령이었다. 초반 지세를 장악한 반군은 5만의 관군을 상대로 비등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승기가 반군 쪽으로 기울던 차에 등장한 관군의 화차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전차부대의 등장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만령전투 당시 반군의 주력이었던 익속군은 다음의 세 가지에서 관군을 압도했다. 첫째,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던 반군은 만령을 장악하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둘째, 그들은 화약 병기 사용에 있어 실전에서 익힌 숙련도를 자랑했다. 피아간에 같은 무기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실전에서 적용했던 실전부대의 그것을 관군이 능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전투에 패하긴 했지만, 익속군은 후위전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일사분란하게 부상당한 병사들을 후송시켰고, 남은 병장기들도 관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폐기했다. 공격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일찍이 후위전이 아니었던가. 방어전에서도 세 겹의 방패부대로 관군의 화약 병기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결국 이시애는 반란 3개월 만에 수하의 배신으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812일 능지처사형을 받고 효수되었다. 세조는 함길도를 좌우로 나누어 통치했고, 반란군의 중심지였던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었다. 함길도는 이후 반역향으로 취급되어 훗날까지도 차별이 이어졌다.

 

이렇게 실전에서도 총통과 화차를 이용한 화력전을 구사하던 조선이 125년 뒤인, 임진왜란 때는 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고전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개국 이래 큰 전란 없이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던 게 문제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조선 정부에서도 화약 무기가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성능 개발과 실전 배치 같은 디테일에는 무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한 세기에 걸친 센고쿠 시대가 계속되면서 포르투갈을 통해 도입한 조총을 개량하고, 보병 전술에도 도입해서 오다 노부나가 같은 다이묘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임진왜란에서도 조총부대로 전쟁 초기 조선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조선군이 총통과 화차 같이 강력한 화약 무기들을 보유했다면 왜란 당시 초전에 그렇게 왜군에게 완패는 면하지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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