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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NW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부터 읽던 제이디 스미스의 <런던 NW>를 한달도 넘어서 다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말고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가 더 이상 묵혀 두었다가는 아예 완독하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서 읽었다. 그전에는 비슷한 케이스로 람페두사의 <표범>을 읽었다. 지금 영화도 보고 있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역시 비스콘티다.
이번에도 역시나 삼천포로구나. 리뷰를 차례대로 써야 하는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부터 하려다 보니 쓸데없는 말들이 길어졌다. NW는 런던 북서부를 지칭하는 우편번호라고 한다. 런던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 순전히 런던 토박이라고 볼 수 있는 저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수밖에. 해외문학을 접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지명이나 사회적 배경을 안다면 쏙쏙 들어올 법한 이야기들이 예의 지식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 <런던 NW>에는 콜드웰 출신, 네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첫 주자인 리아 한월과 변호사로 출세한 내털리 블레이크다. 다른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소설들처럼 <런던 NW>에서도 계급 문제와 인종 이슈가 빠지지 않는다. 전형적이 중산계급 출신의 리아는 사회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경우다. 하지만, 그녀의 절친 내털리 아니 원래 이름인 키샤는 어쩌다 보니 구질구질한 동네 콜드웰을 벗어나 변호사로 성공했다. 게다가 남편인 프랭크 드 어쩌구는 잘 나가는 금융업자다.
한 마디로 말해, 키샤 블레이크는 비록 중산계급 출신의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모조리 부수고 성공의 사다리에 오른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다. 문제는 거의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레쥬메가 그녀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설정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가정마다 소소한 문제들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추구하는 부촌에서 완벽한 가정을 건설하는데 성공한 내털리 블레이크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갈급증이 있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삐딱하는 순간,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붕괴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샤라는 얼치기 사기꾼에게 피같은 생돈을 뜯기는 리아는 순수하다. 남편 미셸은 내털리네처럼 성공하고 싶다. 아니 한 마디로 말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이민자 출신 중산계급이 그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우리네처럼 한 주에 7명씩 뽑히는 로또나 기대하는 수밖에. 그래도 성공의 사다리에 대한 욕심을 저버릴 수 없어, 주식투자에 나서지만 어디 개미들이 소액투자로 그런 막대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는 법이다. 주식시장이라는 도박판은 결국 돈많은 투자자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아와 미셸 부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하나의 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낳는 것이다. 미셸은 무척이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리아는 그런 남편 미셸의 바람을 저버리고 몰래 피임약을 복용한다. 물론 이에 동조자는 내털리다. 후반에 가서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 미셸은 내털리에게 전화해서 화를 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둘에 비해 부수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필릭스 쿠퍼와 네이선 보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털리(키샤)와 나머지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필릭스나 네이선 모두 약쟁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털고 새출발을 원한다. 필릭스는 새로운 애인을 만나 과거를 일거에 청산하려다가 그만 어이없는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제이디 스미스는 앞으로 선행을 하겠다고 마음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자신의 일탈이 남편 프랭크에게 드러난 내털리가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만난 이가 바로 학창 시절 친구였던 네이선이었다. 내가 보기에 필릭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인간이 바로 네이선이었다. 자신이 노숙자라는 사실을 성공한 변호사 내털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네이선. 그에게 과연 새출발할 의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공이 오롯하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런던 NW>는 어쩌면 하나의 복음처럼 받아들여질 지도 모르겠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순간의 즐거움 대신, 미래의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한 내털리 블레이크 같은 변호사야말로 각박한 각자도생의 시대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리아와 필릭스(역설적이게도 그 이름의 뜻이 행운아라고 하던가) 그리고 네이선은 모두 그런 경쟁에서 낙오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작금에 그들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들은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제이디 스미스는 그런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내털리/키샤 같은 인물도 실제 삶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오히려 내털리의 남편 프랭크는 리아와 미셸 부부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상대적이란 말일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키샤 블레이크에게 성공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는 개명(改名)이었다.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문제는 그녀에게 장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콜드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내털리를 키샤로 기억한다. 노력에 의한 신분이나 계급적 상승도 사람들의 기억마저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일까.
<런던 NW>를 다 읽고 나니, 미루던 숙제를 마친 듯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에세이 모음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그 책은 나오지 않나. 그리고 아울러 5년 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스윙 타임>도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원서로 453쪽이라고 하니 분량이 상당한 모양이다. 일단 그 때까지 아디오스, 제이디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