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 - 가장 위대한 영국인, 청년 처칠의 자서전
윈스턴 처칠 지음, 임종원 옮김 / 행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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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처칠의 전기를 읽었다.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어려서는 공부를 하지 못한 문제아였었는데 어느 순간 전쟁 영웅으로 거듭난 인물. 그 뒤에 정치계에 뛰어 들어서는 결국 입지전적인 노력으로 대영제국의 전시 총리가 되어 풍전등화의 조국을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구해낸다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처칠이었다.

 

그러니까 위인으로 꼽히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인물이라는 게 종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윈스턴 처칠의 본질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의 향수를 짙게 가진 빅토리아 시대에 집착하는 라떼꼰대였던 것이다. 영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히틀러와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 질서를 수고하려는 지독한 제국주의자였고,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나같은 퍼슨 오브 컬러(person of color:유색인종의 고상한 표현이다)가 이런 사람을 곱게 보아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스펜서-처칠 가문 출신의 윈스턴 처칠은 아버지 랜돌프와 미국인 어머니 제니 제롬 사에서 빅토리아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18741130일 태어났다. 영국 귀족 자제들에게 필수였던 라틴 어와 그리스 어에 젬병이었던 미래에 나라를 구할 영웅은 소년 시절 문제아일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었다. 아들이 법률가로 성공할 것을 원하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던 모양이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삼수 하는 동안 죽은 언어 대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를 갈고 닦은 처칠의 목표는 군인이었다. 이 시절에 갈고 닦은 언어의 힘이 그에게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위업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본다. 결국 어린 시절에는 하나라도 배우는 게 미래의 도움이 된다는 게 아닐까. 사관학교에서도 그놈의 성적 때문에 보병이 아닌 기병을 선택해야만 했다.

 

처칠이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150명 중에 8등으로 졸업하고(놀라운 변신이 아닌가!) 초임 장교로 부임하던 18951,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이제 오롯하게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된 것이다. 자유당과 민주주의 정권 아래 지속된 장기간의 평화로 장교들은 실전 체험을 원했다. 고작해야 식민지 인도나 수단의 소규모 반란진압에 투입되던 장교들이 가지고 있던 참전욕구는 곧 이어 벌어질 보어전쟁과 대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채워질 전망이었지만, 당시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청년 처칠의 선택지는 쿠바였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쿠바에 순전히 실전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스페인 점령을 거부하고 독립전쟁에 나선 쿠바 독립군 토벌에 나선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조선독립군을 탄압하는 일본 군대에 실전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제국주의 국가의 청년 장교가 자원해 나선 꼴이 아닌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처칠이 청년 시절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자신의 전기에 이런 글을 남기지 않았겠지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른다.

 

한편 1895년 말 수단과 트란스발(남아프리카)에서 터져 나온 위기는 기존의 자유당 글래드스톤 내각의 유화론으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보수당 솔즈베리 내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19세기식 사고가 아니었던가. 보어전쟁으로 이어지는 분쟁은 일단 뒤로 하고, 처칠은 동양의 인도로 향한다. 그리고 국경에서 사납기로 유명한 파슈툰 족의 반란진압에 투입되었다. 너무 오래 전의 그의 전기를 읽은 탓인지, 이 부분은 조금 생소하게 다가왔다.

 

인도 시절부터 그는 종군기자이면서 동시에 군인이라는 다소 기이한 스타일의 주인공이었다. 수단 투입을 앞두고 그에게 관심종자훈장사냥꾼이니 하는 세간의 평이 따라 붙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원정군 총사령관인 허버트 키치너 장군의 반대로 처칠의 종군이 난관에 부딪히지 않았던가. 처칠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정원 외 장교 신분으로 그토록 원하던 수단 전선에 출정에 나서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옴두르만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데르비시군을 상대로 한 기병돌격은 그야말로 영국 육군사의 전설이 될 만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처칠은 <강의 전쟁>을 집필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적인 토리 민주주의자라는 타이틀로 올덤 선거에 나섰지만, 근소한 차이로 자유당 후보에게 패배한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처칠의 경력을 정점을 찍을 다음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어전쟁이었다. 사실 이 책의 40% 가량이 투입된 보어전쟁 스토리는 정치인 처칠의 성공 기반이 되었다. 사골 곰탕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패스하도록 하자.

 

일전에 만난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처칠 평전에서 독일 출신 저자는 그를 기회주의적 독재자라는 박한 평가를 내린다. 소설에 등장하는 19세기 인물 처칠은 세계주의자라기보다 조국에 충성하는 애국자의 면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군인 경력을 마치고 정계에 입신한 처칠은 훗날 전시내각 총리로 빈사의 상태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리더십으로 최대 맞수 히틀러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쟁 말미에는 루즈벨트와 스탈린이라는 거두와 함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죽을 때가지 고수한 제국주의적 면모에 대해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기도 하다. 이런 문제적 인간이 남긴 청년기의 기록은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제국의 마지막 광휘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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