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슬픔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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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쇼 비즈니스의 신세계를 창출했던 보드빌 스타 버펄로 빌코디의 일대기를 그린 <대지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일제에 협력했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생각이 났다. 리틀 빅혼 전투의 영웅 시팅 불(타탕가 이요탕가)이 쇼단의 일원으로 역사적 재건을 재현한 얼치기 쇼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서 재현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형식의 텍스트로도 반복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의 재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선과 악으로 구분된 지지난 세기말부터 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짚어낸 버펄로 빌은 미국 기병대로 상징되는 선이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악의 무리 인디언들을 전투에서 물리치는 리얼리티 쇼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달러를 삽으로 퍼낼 정도의 부를 쌓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그런 성공도 오래 가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프랑스 작가가 오욕과 거짓 선전으로 점철된 미국의 서부개척사를 후벼 파낸다는 점이 역설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크 뷔야르는 미국보다 훨씬 더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조국의 알제리나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먼저 다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다른 작품들인 콩고, 레콩키스타 그리고 종교개혁을 기대하고 있지만 왜 곁다리만 훑고 있냐는 그런 비판을 하고 싶어졌다.

 

다시 누구보다 먼저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낸 버펄로 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화 시대에 앞서 버펄로 빌은 대중이 원하는 환상적 욕구를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해냈다. 그렇다면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또다른 쇼비즈 사업가 존 버크는 캐스팅에 주목했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미국 기병대를 몰살시킨 위대한 시팅 불 추장을 캐스팅해서 자신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은판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시팅 불과 존 버크의 사진을 보라.

 

<와일드 웨스트 쇼>에 캐스팅된 시팅 불과 인디언 전사들은 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에도 건너가 대중들에게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다시 한 번 자존심은 물론이고, 부족의 영혼마저도 삼켜 버리는 무서운 자본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쇼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팅 불 추장은 평화로운 말년을 기대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훗날 <운디드니> 사건으로 알려진 미 기병대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과 부족은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비극이었던 <운디드니> 사건 역시 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마저 진 전쟁이 아니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참가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픽업하면서 과연 미국이 전쟁에서 진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인디언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버펄로 빌이 무대에서 연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진짜 현장에 있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는 그런 기묘한 과정에 대한 설명은 시뮬라크르 정도로 퉁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버펄로 빌의 흥행 신화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쇼들이 그렇듯,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역시 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뒷길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버펄로 빌이 순순히 왕좌를 내주진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총아 영화 산업에서 버펄로 빌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코디도 만들었지만 서부 개척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성지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도시로서의 순기능이 없었기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쓸데없이 나이 어린 여성에게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연극무대에 데뷔시키기 위해 투자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말미에 실린 눈송이 이야기는 왜 들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거와 버펄로 빌의 스펙터클 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이전에 소개된 <그날의 비밀>에서도 그랬지만, 저자 에리크 뷔야르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잘 다루고 있다. 짧고 강렬한 서사는 마음에 들지만, 아무래도 분량 때문인지 깊이 면에서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더 할 말이 없던가. 어쨌든 콩고, 종교개혁 그리고 레콩키스타 이야기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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