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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소설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박수현 옮김 / 아르테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우연히 알게 된 에스파냐 출신 우나무노의 작가의 두 번째 책을 읽었다. 에스파냐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의 전례를 따른다는 듯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이야기들이 주르르 따라 붙는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는 세르반테스의 ‘내면에서 유익한 모범’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에 주목하자. 언젠가 미래에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이들에게 자신의 글이 그 어느 누구도 기만하지 않을 거라고 세르반테스는 보증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문학적 시조 세르반테스를 신봉하는 지식인 우나무노 역시 에스파냐식 리얼리즘을 따르겠다는 선언인가.
또 하나 우나무노는 자신의 소설에서 삶과 현실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겠다고도 한다. 지극히 대중소설의 그것을 따르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첫 번째 소설 <더도 덜도 아닌 딱 완전한 남자>에 나오는 절세미인이자 레나다 지방의 공식 미인(소설에는 항상 이런 미인이 등장하기 마련이지) 훌리아 야녜스의 아버지 돈 빅토리노는 그야말로 장사꾼의 전형이다. 그가 거래하고자 하는 품목은 다른 물건이 아닌 바로 자신의 ‘공식 미인’ 딸이다. 그리고 훌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으려고 벼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름다움이 그녀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서두의 예언이 불길하게 다가온다.
애인과의 야반도주는 무산되고, 갑자기 등장한 아메리카에서 온 벼락부자 홀아비 알레한드로 고메스가 등장하면서 예의 통속 드라마는 질주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는 남자, 알레한드로에게 훌리아는 썩 어울리는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한 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에스파냐 최고의 미녀 훌리아는 점점 ‘푸른 수염’ 전설의 주인공 같은 알레한드로에 매인 노예로 전락한다. 훌리아는 오로지 알레한드로가 자신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훌리아를 전심으로 유혹하는 남자로 등장하는 보르다비에야 백작의 역할은 알레한드로에게 자신이 가진 영롱한 보석의 가치만 높여줄 뿐이다. 나라도 이런 식의 ‘완전한 남자’와 사는 삶이라면 지옥이 따로 없지 않을까 싶다. 결국 스토리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솔로몬 왕의 판결을 연상케 하는 <두 엄마>에는 과부 라켈과 불쌍한 남자 돈 후안이 캐스팅되었다. 돈 후안은 어쩌다 이런 요부에게 빠지게 되었던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었던 라켈은 돈 후안에게 베르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한다. 이 제안을 듣는 순간, 과부의 꼭두각시가 된 남자는 지옥 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베르타의 롤모델은 바로 라켈이었다. 베르타는 이런 추잡한 시나리오를 알면서도 자신이 충분히 과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제안을 수락한다. 그녀보다 한 수 위였던 라켈은 돈 후안의 모든 재산을 자기 것으로 이전하고, 돈 후안을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그런 재산관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항상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그런 실수가 아니었을까. 결국 라켈의 계획대로 베르타는 아이를 임신했고, 딸을 낳았다. 라켈은 돈 후안과 베르타의 딸에게 자신의 이름인 라켈/켈리나를 명명한다. 이거 진짜 막장 드라마의 연속이로구나. 결국 두 여자에서 영혼이 파탄난 돈 후안을 자동차를 타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마녀 같이 돈 후안을 조종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라켈은 자신과 같이 과부 신세가 된 베르타마저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게 된다.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룸브리아 후작>은 앞선 두 개의 이야기를 능가하는 그런 막장 스타일의 소설이다. 룸브리아 후작 돈 로드리고에게는 가문을 이을 아들은 없었고 카롤리나와 루이사 두 딸만 있었다. 둘째딸 루이사가 트리스탄 이바녜스와 결혼하게 되자, 언니 카롤리나는 수도원으로 갔다는 소문과 함께 결혼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데릴사위 트리스탄은 그저 미래의 룸브리아 후작의 생산을 위해 들인 망나니, 범죄자 혹은 하인 같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어쨌든 루이사는 아버지 돈 로드리고의 바람대로 아들 로드리긴을 낳았다. 돈 로드리고는 손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루이사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된다. 그러자 지난 4년 동안 행적을 알 수 없었던 카롤리나가 느닷없이 등장해서 홀아비 트리스탄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그러니까 카롤리나는 로드리긴에게 이모이자 새엄마였던 것이다. 뭐 이래도 되나 그런 건 묻지 말자. 아니 이게 서문에서 우나무노 작가가 밝힌 소설에서 모름지기 다뤄야 하는 삶과 현실의 모범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덕률이야 어떻든 그리스어 교수님이 구사하는 통속적인 스토리라인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룸브리아 후작 가문의 숨겨진 비밀들이 잇달아 밝혀지는데...
철학자에 교수 출신 소설가가 겨냥하는 삶의 진실들은 사실 썩 아름답지는 않다. 하긴 우리네 삶이 항상 그렇게 아름다움만으로 가득했던가. 그것들은 단지 우리의 희망일 따름이었을 뿐이다. 내가 돈 후안이었다면, 내가 트리스탄이었다면 혹은 ‘완전한 남자’ 알레한드로였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의 선택은 하나 같이 부도덕하고 자기파멸적이었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까. 삶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과연 없단 말인가.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던 게 아닐까. 기로에서 그들이 하는 선택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 같이 패착으로 귀결되는 걸까. 어쩌면 우리네 삶은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움직이게 설계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순식간에 읽고 나서 휘발된 기억을 되살리려니 리뷰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