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2가지 충격 실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 갤리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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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갈등을 줄이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사법 시스템을 개발해냈다. 최근 어느 조사에서는 미래에 없어질 직업군 중의 하나로 판사를 거론하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법률 조항에 근거해서 인간보다 더 공정한 재판을 진행할 지도 모르겠다. 피조물인 인간인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재판에 관련된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형사 소송 사건의 변호사로 활동해온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자신이 맡은 사건 중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12개의 이야기들을 추려 독자에게 소개한다.

 

우선 우리는 법에 대해 무지하다는 걸 고백한다. 내가 당사자가 되지 않는 이상, 법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법률 용어는 사법 시스템의 기득권층이 일반인을 배제하기 위해 고안해낸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려운 법률 용어들이 필요한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의 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한자가 아닌가.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다. 본론에 들어가 보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유년의 추억이 깃든 <호수집>에 사는 어느 얌전한 독일 아저씨는 자기 삶의 바운더리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위협받자, 상하이에 살던 할아버지가 남긴 무허가 총기로 무장하고 이웃집 아줌마에게 총을 난사한다. 선량했던 시민이 자기 삶의 공간이 타인에 의해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평쟁이로 그리고 더 나아가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 이웃을 공격하는 장면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이웃집 아줌마가 죽을 만한 죄를 지었단 말인가.

 

독일로 이민 온 터키계 가정에서 자란 셰이마는 고유의 종교와 문화 관습을 일체 부정하고 자력으로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나 기피하고 싶은 범죄자의 변호를 자원에서 맡는다. 그녀가 변호를 맡은 인물은 베를린의 악랄한 포주였다. 루마니아에서 취업시켜 준다는 사탕발림으로 꾀어온 여성을 매춘부로 만들고 성적 착취를 서슴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변호사는 악당 포주의 변호를 포기하고 사임을 요청하지만 재판장은 법률적 근거를 들어 허락하지 않는다. 어렵게 증언에 나선 루마니아 여성을 실종되고, 악당의 재판은 파기 환송되고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된다. 과연 정의는 살아 있는가.

 

첫 에피소드에서도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다 재판에 넘겨진 남편이 그런 식으로 방면되었다가 결국 아내를 망치로 살해하고 만다. 정황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식의 기계적 재판이 결국 더 큰 화를 불러온 것이다. 재판장이 남편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판결을 내렸다면 아마 부인은 죽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일단의 사건에서도 검찰이 보여준 기소편의주의 혹은 선택적 정의에 대해 수긍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출산 이후,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남편이 기괴한 방식으로 성적 판타지를 추구하다가 죽은 사건도 흥미롭다.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된 피고가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변호인은 자기 고용주의 주장에 따라 소송에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까.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게 정의로운 일인지 궁금했다. 이 장면에서는 전범으로 몰린 자신의 아버지의 변호에 나섰다가 진실을 알게 되는 변호사 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뮤직 박스>가 연상됐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과 정의는 절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는가?>의 저자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보통 사람들에게 어려운 전문적인 법정 용어가 난무하는 복잡한 형사 소송을 재료로 한 법정 드라마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로 만들었다. 뻑뻑한 원재료를 무두질해서 부드럽게 만들고, 동정과 공감을 유발시키는 저자의 글쓰기는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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