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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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청년 페터 한트케는 여전히 이십대다. 그리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선형적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골키퍼>의 줄거리는 싱겁다. 예전 유명 골키퍼였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건설 공사장의 조립공으로 일한다. 그러니까 축구 선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예전의 영광은 잊고 노동자로 변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때 나치 제3제국의 일원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후손들도 예외는 없다는 설정이다.

 

블로흐라는 친구는 현장감독의 수신호를 해고로 오해하고 일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바로 실업이라는 불안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빈의 곳곳을 누비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에 나오는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베테랑 용사는 뉴욕에서 택시를 몰고, 축구 선수로 아메리카 대륙도 밟았던 왕년의 골키퍼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빈의 이곳저곳을 헤맨다. 불안은 개인의 방랑을 그리고 그 방랑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극장 매표원 아가씨 게르다 T를 우연히 죽인 블로흐는 머물고 있던 호텔에 가서 짐을 싸서 도주에 나선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폭력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자신을 검문하려는 순경을 전화번호부로 기절시키는 신공을 보여주는 블로흐. 그리고 그는 남쪽 국경 부근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는 헤르타를 찾아간다. 몸이 피곤한 탓인지 어쩐지 이 부분은 정말 지루했다. 인근 켈러나 성당을 누비며 무언가 건수를 찾는 듯한 블로흐에게 더블데이트 제안도 들어오지만, 남자는 시큰둥하다. 내재된 불안이 초래할 거대한 파도가 곧 다가온다는 걸 잘 알지만, 사내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고 평온해 보인다.

 

사실 소설에서 발생할 만한 일들은 모두 초반에 발생했다. 나머지는 운동선수라기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듯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블로흐의 일상에 대한 스케치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인 블로흐의 불안에 소설은 방점을 찍고 있다. 과연 블로흐는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인가. 페터 한트케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누적된 현대인의 불안을 보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경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실업의 공포를 느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은 곧 생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일자리를 잃고 돈을 벌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소비생활을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기 위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처럼 블로흐 역시 도주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이야 실업수당 혹은 퇴직금으로 어찌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일자리 없이 지속적인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체국 시퀀스에서 페터 한트케 작가의 대리인인 블로흐의 언어유희가 가장 돋보인다. 그리고 전처에게(그는 이혼남이었다) 우편환을 보내 달라고 전화로 부탁한다. 전처가 그 부탁을 들어 주었을까? 물론 아니다. 한편, 블로흐는 도주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인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국경마을로 도주했으면서도 은신하는 대신, 동네 청년들과 싸움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혈기가 지금의 나락으로 블로흐를 밀어 넣은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칠칠치 못한 블로흐는 범죄 현장 곳곳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미국 동전들)를 뿌리고 다닌다. 아마 그는 곧 지명 수배되어 잡힐 것이다.

 

세관원과의 대화는 앞으로 벌어질 순경/경찰과의 대치 상황을 대비한 블로흐의 팁이라고나 할까. 블로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주할 것이다. 페널티킥을 막 차려는 키커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체스나 장기판의 고수들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본 치열한 수싸움의 문학적 표현일 지도.

 

<페널티킥>은 나의 두 번째 노벨상 숟가락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패스했고(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게 나의 문제다), 내가 수용 가능한 것들만 골라 먹었다. 나도 페터 한트케를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자족적인 나의 독서, 멋지다. 그러나 저러나 페터 한트케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 중인데, 과연 스웨덴 한림원은 일절의 정치적 고려 없이 작가의 문학적 성과만 가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단 말인가. 그런 거짓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해대는 그네들의 강철멘탈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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