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책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작가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그래서 해마다 부커상(보수적인 노벨문학상보다 좀 더 다양하고 선택의 폭이 넓다) 후보작에 오르는 작품들을 눈여겨보는 편이다. 올해도 케빈 배리나 맥스 포터 같은 작가들에 대해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알게 된 데이빗 설로이는 다음 달에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싸인 받으러 가야지. 부커상 숏리스트가 발표되자 곧바로 작년 수상작에 대한 관심이 갔다. 그렇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었지. 부커상 수상작이 우리에게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년 정도 필요한 것 같다. 그렇다면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책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솔직하게 말해서 애나 번스의 세 번째 소설 <밀크맨>의 장벽은 드높다. 우선 수백 년 동안 지속된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소설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오래 전에 세계 분쟁지역의 아일랜드 공화군(IRA) 덕분에 북아일랜드 상황에 관심을 가졌는데, 아무래도 우리의 일도 아니고 하다 보니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동안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가톨릭교도의 IRA와 신교도 UDA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위 정치권의 노력과 막대한 재정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과거사에 대한 상이한 시각 때문에 여전한 갈등이 임시적으로 봉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은 애나 번스 작가가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철저한 익명성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18세의 소녀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어쩌면-남자친구”, 주변 인물들 역시 핵소년”, “셋째 형부등으로 불린다. 참고로 그녀는 걸어다니는 소녀라고 불린다나. 애나 번스는 전체주의적 부족사회같은 북아일랜드 공동체의 지나친 관심이 버거운 십대 소녀의 감성을 대입해서 기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현대 영미문학 스타일의 짧게 치고 나가는 문장이 아니라 너무 길어서 몰입이 쉽지 않았다.

 

이런 장벽을 헤쳐 나가면 오롯하게 2018년 부커상에 빛나는 <밀크맨>의 고갱이를 만나볼 수 있다. 중년(41)의 반대파 준군사 조직원이자 지역 영웅으로 간주되는 밀크맨은 소녀를 스토킹한다. 그는 왜 주인공(18)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주인공은 그저 부족사회로부터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18세기 혹은 19세기 소설(<아이반호>)에 집착하면서 자신을 그들로부터 소외시키고 차단하고 싶을 뿐이다. 주인공의 엄마에게 딸들은 그저 때가 되면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출산해야 하는 존재로 비친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 끔찍한 트라우마 덕분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다.

 

주인공 소녀는 그놈의 밀크맨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부풀리고 확대 재생산한다. 소설에서는 유비통신으로 표현되는 가짜 뉴스 덕분에 그녀는 졸지에 행실이 나쁜 여자가 되었다. 주인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그녀에게 다가온 밀크맨은 그녀의 모든 것 심지어 상상까지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자동차 정비공인 그녀의 어쩌면-남자친구(20)가 어쩌면 큰형부가 됐을 지도 모를 첫째 언니의 남자친구처럼 자동차 폭탄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북아일랜드)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한다. 바다 너머 저편의 나라는 팔백년 동안 걸어다니는 소녀가 사는 곳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리고 신교도들을 대거 유입시켜 종교 갈등을 유발시켰다.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지만 다른 방식의 믿음으로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가 수호자와 반대파들이 등장했다. 무장 경찰들은 밀크맨으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을 도청 감시하고, 개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 와중에 죽은 고양이의 사체를 묻어 주기 위해 나선 걸어다니는 소녀, 가운데언니는 상도를 벗어난 사람으로 치부되어 루머와 수치스러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뭐 그 세계에서는 놀랍지도 않은 설정이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밀크맨의 개입으로 걸어다니는 소녀의 주변에는 잇달아 불행이 발생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독을 먹이는 알약소녀에게 당한 걸어다니는 소녀는 전통 비법에 의한 구토와 주변 기도꾼들의 도움으로 살아나지만, 그녀에 대한 부당한 시선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게 잘못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스로 고립과 소외를 선택한 주인공 걸어다니는 소녀의 결정이 오히려 주변인들에게서 상도를 벗어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밀크맨이 매복한 무장 경찰의 총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고, 걸어다니는 소녀의 엄마의 고백이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누군가와 무작정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비극은 또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저자가 설정한 어쩌면-남자친구에 대한 진실, 밀크맨의 정체성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후반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클럽에 간 걸어다니는 소녀가 아무개 아들 아무개에게 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여성들이 보여준 연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설사 그들의 행동이 걸어다니는 소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상당히 정치적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 시대를 경험한 개인의 서사이기도 하다. 소설의 상당 부분에 작가가 직접 체험한 자전적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따르는 그런 독서의 시간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