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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2년 전, 제니퍼 이건의 <맨해튼 비치>가 출간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책에 대해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작가의 책들을 사 모았지만 정작 다 읽는 데는 실패했었다. 그리고 다시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볼스테드법(금주법) 시절의 갱스터,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여성 전시노동까지 다루는 역사소설이라고 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선 제니퍼 이건은 방대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다양한 층위의 내러티브 설계를 촘촘하게 준비했다. <맨해튼 비치>에는 우선 가족 서사가 전면에 등장한다. 1934년 이제 막 금주법이 풀렸지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덮친 대공황(The Depression)으로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특히 주인공 애너 케리건의 집에는 더더욱 그랬다. 한 때 호시절을 누리던 애너의 아버지 에디는 바닥까지 몰락해서 지금은 갱스터 친구 더니의 백맨(검은 돈의 운반자)으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둘째 딸 리디아의 존재는 그에게 죄책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그놈의 돈이 없어 리디아를 데리고 외출도 못하고, 무엇보다 애너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게 애너는 항상 마음에 걸린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이 이런 판국에 아버지 에디는 소설이 시작된 1934년으로부터 3년이 지나 모든 곳으로부터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에디에게 벌어진 걸까? 제니퍼 이건 작가는 무심코 하나의 미스터리를 툭하고 던진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교한 내러티브의 일환일 따름이다.
소설의 세 번째 주인공에 해당하는 이탈리아계 갱스터 덱스터 스타일스가 등장할 차례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소년 보호소 출신으로 암흑계에서 성공해서 잘 나가는 은행가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승승장구하는 갱스터다. 덱스터의 집이 있는 맨해튼 비치에 소설 초반, 애너와 에디가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에디의 실종이 덱스터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작가는 암시한다. 애너에게 “맨해튼 비치”라는 공간은 어쩌면 순수한 욕망의 상징 같은 장소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간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나 1942년이 되었다. 먼로주의를 고집하던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었다. 총력전으로 모든 건장한 남성들이 조국을 위해 자원입대해서 전쟁터로 향한다. 자, 그렇다면 후방에서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군수품은 누가 만들 것인가?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여성들의 노동력이 필요해진 시절이었다. 우리의 주인공 애너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브루클린의 해군공창에서 검수를 하는 직업을 얻게 됐다. 애너의 노동으로 번 수입으로, 케리건 집안은 간신히 유지되었다. 그리고 동생 리디아의 삶도.
자, 이제 애너와 갱스터 덱스터의 접점이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가 관점이다. 내러티브 직조의 달인인 제니퍼 이건 작가는 정말 빼어난 실력으로 텐션이 줄어들 때마다 뻥뻥 터지는 획기적인 사건들로 텐션과 독자들의 집중력을 고도로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애너가 욕망하는 장소인 맨해튼 비치로 덱스터의 도움으로 리디아를 데려가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리디아의 갑작스러운 죽음, 어머니 애그니스의 고향 미네소타행, 당시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다이버로서의 도전에 이르기까지 정말 빠른 속도의 전개가 도대체 소설을 읽는 내내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친다.
뉴스릴처럼 간간히 들려주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이야기, 로스토프 해방전, 하르코프 공방전 그리고 무르만스크 수송작전 같은 세계사적 변곡점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긴박했던 당시 상황들을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덱스터의 장인 아서 베링거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미래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전망은 사후약방문 격이긴 하지만, 놀랍다. 그러니까 이미 미국의 엘리트 계급들은 전후 미국의 약진과 그들의 후손이 누릴 부와 영광을 미리 예견했다는 것이지 않은가 말이다.
프랭키 Q의 종복이었던 덱스터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던 자신의 갱스터 사업들을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원했으나, 장인과 주인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결국 용도폐기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오로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비롯된 애너와의 관계도 그의 파멸에 한 몫을 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딸에게 충실하라는 장인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덱스터에게 과연 할 말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설 전개상 압권 중의 하나는 죽은 줄 알았던 애너의 아버지 에디의 부활이었다. 전시 상선단의 일원으로 대서양을 지나 인도양에까지 도달한 에디의 배가 유보트의 어뢰를 맞아 피격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영국령 소말릴랜드까지 흘러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겠다며 뉴욕의 바다 속으로 침잠해 가는 애너의 용기에도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내러티브라면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불운한 가족서사, 갱스터, 전쟁, 다이빙, 전시노동 그리고 치명적 유혹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이야기 틀이 아니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의 파괴적인 군사력을 상쇄해 버린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에 대한 찬가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애너 케리건과 로즈들의 전시노동으로 만들어진 리버티선으로 대륙 너머로 출정나간 미군들과 동맹국들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무한정으로 만들어냈고, 에디 케리건으로 대변되는 용감한 상선대 역시 바다의 늑대무리인 독일의 유보트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 독일과 일본의 전쟁기계들도 미국이 보유한 무시무시한 전시 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면, 전쟁에서 이길 승산이 없다는 걸 개전 전부터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대영제국의 총리는 자기 어머니의 나라를 전쟁에 끌어 들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백맨(bagman)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클래식한 스타일의 갱스터 덱스터의 옴부즈맨이 되었던 에디에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을 것이다. 이제 간신히 대공황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중증 장애를 가진 리디아를 부양할 방법이 없었다. 갱스터 세계의 모든 것을 파악한 그가 덱스터와의 위험한 거래에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제니퍼 이건이 구상한 방대한 역사소설 <맨해튼 비치>의 중심에는 금기에 도전한 여성 다이버가 우뚝 서 있다. 이 내러티브의 마술사는 엄청난 리서치와 인터뷰를 통해 1940년대 전쟁 중에 있던 미국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모습과 살아 숨 쉬는 듯한 캐릭터들을 다채롭게 재현해 내는데 성공했다. 처음 두터운 소설의 첫 장을 펼쳤을 때의 육중한 느낌은 중반을 지나 독서의 속도감이 붙기 시작하면서, 후반으로 갈수록 조바심을 내게 만들었다. 과연 제니퍼 이건의 전작들은 어떤지 기억의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녀석들을 찾아 역주행에 나서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