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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끝없는 투쟁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평점 :

출간될 때부터 고대하던 윈스턴 처칠의 짧은 전기를 읽었다. 저자는 독일 출신 저널리스트 제바스티안 하프너다. 이 책은 처칠이 죽고 난 뒤, 2년 후인 1967년에 발표되었다. 히틀러의 전격전으로 전 유럽이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마지막 보루였던 영국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절망적 상황에서 패전의 위기를 승리로 이끌어낸 정치가 처칠의 다른 면을 나는 이 평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주 어려서 꽤 두꺼운 처칠의 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젊은 시절 처칠이 보어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게 된 그의 본질은 반혁명주의자에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다는 점 정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대영제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전시 총리로 거국내각을 이끌었지만 전후 총선에서 패배해서 실각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17세기까지 근원을 올라가는 말버러 공작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윈스턴 처칠은 영국 귀족 자제들을 위해 준비된 엘리트 코스를 수행하기 위해 매질 지옥으로 알려진 사립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라틴어를 비롯한 다른 과목에서는 낙제생이었다. 개인의 개성을 말살시키고, 오로지 체제에 충성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는 이름의 횡포가 수세대를 거쳐 입증되었다는 점이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혹독한 시기를 버틴 처칠의 뚝심과 불굴의 의지가 어쩌면 이 매질 지옥에서 탄생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인에 가까운 정치인이었던 그의 부친 랜돌프 처칠 역시 한 시대를 주름잡은 풍운아였다. 스캔들로 아일랜드에 유배를 당했던 랜돌프는 토리 민주주의라는 기발한 정책으로 보수당 혁신의 기수로 등장한다. 물론 그의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고, 정치적 자살 같은 행위와 요절로 후계자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된다.
거의 망나니 낙제생에 가까웠던 처칠의 운세는 약관의 나이에 기병 소위가 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고난 전사였다. 쿠바, 인도 그리고 수단의 전장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1898년 영국 최후의 기병 돌격이었다는 옴두르만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전사의 전형이었다. 한편, 종군기자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첫 정치도전인 하원의원 선거에서 보기 좋게 떨어진 젊은 처칠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바로 보어전쟁이었다. 종군기자로 참가한 보어전쟁에서의 맹활약은 그의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그가 정치인이 되자마자 한 일은 바로 기회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정치 철새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다. 훗날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런 이유로 해서 자당 의원들에게도 믿을 수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쨌든 정치 천재 데이빗 로이드 조지 밑에서 장관직을 연달아 맡으면서 젊은 정치가 처칠은 승승장구했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처칠이 자유당 내각에 있으면서 시행한 굵직한 사안들에 대한 디테일이 이 책에는 담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본위제 부활과 노조파업에 대한 강경대응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참조해야할 것 같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해군장관으로 ‘대전쟁’(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을 꿰뚫어본 혜안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실전에서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육해군 합동공격 실패는 처칠의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의원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예전 같은 영화는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전사로서 처칠은 전쟁에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평화로운 시절에 그의 존재는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가 한량 생활을 하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는 커다란 변화들이 발생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에 제국주의자 처칠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과 일란성 쌍생아 같았던 독재자 히틀러의 나치즘이 독일을 휩쓸었다. 어떤 면에서는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처칠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와 약자를 압제를 견딜 수가 없었다. 계급적으로도 처칠은 신사였고, 교육을 통해 유전된 도덕률이 그를 세계의 데몬과 맞서 싸우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우리에게는 승리의 “V”로 각인된 위대한 정치가 처칠의 과대평가된 지점들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처칠에게 국가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조국을 내던져서라도 히틀러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명제가 더 중요했다. 그보다 한수 위였던 정치 천재들인 로이드 조지와 체임벌린이 구사한 유화정책은 노동당과 인도에서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도무지 욕심을 채울 수 없었던 히틀러에게는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전쟁으로 한 세대가 소멸하고, 제국의 여력을 까먹은 영국으로서는 도저히 새로운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전시 거국내각의 총리가 된 처칠은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총력전에 돌입한다. 전사였던 노년의 총리에게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은 희생되어야 했다.
하프너 작가는 처칠의 유효성을 1940년 6월부터 일 년 정도로 잡고 있다. 세계사에서 처칠의 중요성은 딱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사실 육지에서 독일을 상대한 것은 영미군이 아니라 동쪽의 소련군이었다.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 그리고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처칠은 소련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고, 유럽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남부전략(북아프리카-이탈리아-트리에스테-빈)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막강한 독일군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전진이 지지부진해지고, 제2전선을 열어 달라는 스탈린의 거듭된 요청을 더 이상 연기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전쟁 초반 독일 전쟁경제의 목줄을 조르기 위해 실시했던 나르빅 작전의 실패도 총사령관 처칠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스 원정의 실패는 또 어떤가. 자신이 구상한 남부전략이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처칠은 스탈린과 단독으로 유럽의 지도를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는 영국이, 루마니아는 스탈린이 그리고 전쟁의 원인이자 자신들이 해방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던 폴란드는 서방으로 넘기는 딜을 서슴지 않는다. 처칠은 어디까지나 대영제국의 존속과 조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영국의 애국자일지는 몰라도 세계적 정치지도자라는 기존의 위상과는 너무 다른 게 아닌가 말이다.
저자는 냉정하게 히틀러의 몰락이 이제 기정사실이 되자, 전쟁에서 처칠이 할 일이 없어졌다고 기술한다. 전쟁 후반 영국 대신 전쟁의 주역이 된 미국이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동쪽으로 진군해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만나게 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미국과 소련이 전면에 부상했고, 대영제국은 예전의 영화를 뒤로 하고 몰락했다. 처칠은 전사로서 강인한 인내와 끈기로 조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다. 주저하던 미국의 루즈벨트를 설득해서 결국 군수품 지원과 참전을 이끌어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결국 전쟁에 승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영국 시민들은 처칠이 전후 수습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갈리폴리 패전 때처럼 모두가 처칠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1951년 불사조처럼 부활해서 두 번째 총리의 자리에 올랐지만 노쇠한 정치가가 할 일은 없었다.
독일 출신 이방인으로 비교적 객관적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윈스턴 처칠의 공적 뿐만 아니라 실책 그리고 본질적 삶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영도하는 지도자로서는 손색이 없었지만, 평화 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기회주의적 독재자의 모습 때문에 적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과 비슷한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던 운명의 숙적 히틀러를 쓰러뜨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처칠이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자 선거에서 시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가 그동안 궁금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에 관한 전후사정을 알게 된 점을 가장 큰 수확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